“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연중 제 16 주일 1독서와 복음의 공통어는 시중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아브라함은 나무 아래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런데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 말씀만 듣는 마리아와
사람들 시중을 드는 마르타가 구분이 되는 것에 비해
아브라함은 사람을 시중들다가 하느님을 시중듭니다.
우리 수도생활 안에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서
활동 수도회와 관상 수도회가 나뉘는데 저는
오늘 주님 말씀이 꼭 활동과 관상을 나누는 것인지 의문이 가고,
오늘 아브라함의 얘기가 더 통합적으로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마르타가 혼자만 시중드는 문제로 불평을 하자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주님의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다른 일은 다 필요 없고, 기도와 관상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좋은 몫이라는 말씀이겠습니까?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에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랑이고,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필요한 한 것 하나가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이 겸손이니 가난이니 지혜니 하는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가난을 제일 중요시 하고 집착할 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종합 비타민처럼
겸손, 가난 등 모든 덕의 종합이요 결정체이기에 필요한 것 하나인 겁니다.
같은 맥락으로 필요한 것 하나가 하느님이라고 해서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필요치 않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사람 관상과 피조물 관상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지요.
오늘 아브라함의 얘기를 보면
도두가 관상의 대상이고,
모든 곳이 관상의 자리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곧 하느님이요,
지나가는 나그네를 시중든 것이 하느님을 시중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나그네를 보고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나그네를 지나쳐보거나 지나쳐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지나쳐 가지 않도록 붙잡는 것이 바로 관상입니다.
관상은 어느 것도 대충 보거나 지나쳐보지 않고 관상합니다.
그래서 꽃을 관상하면 하느님을 관상하고,
인간을 관상하면 하느님을 관상하게 되죠.
그리고 오늘 아브라함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같이 관상합니다.
모두가 같이 관상하도록 초대한다.
복음으로 치면 마르타인 부인 사라를 관상에 초대합니다.
주님 시중드는 일을 아브라함과 같이 하는 것이 사라의 관상입니다.
관상을 한 사람의 일은 그저 일이 아니라
관상적인 일이고, 그래서 성사적인 일입니다.
일과 관상의 나뉨이 없고 통합적입니다.
우리 모두 관상적인 일꾼들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