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악하고 절개 없기에
표징을 요구한다고 하시는데 복음을 보면 아주 겸손하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하며 보고 싶다고 했으니
겉으로만 보면 요구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청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자들이 교만하게 요구하는 거라고 하십니다.
이들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기적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그 기적으로는 충분치 않고
꼭 내가 요구하는 기적을 내 눈으로 봐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들은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이 너무도 절실히 필요한 외로운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치유가 너무도 절실히 필요한 불치병자도 아니며,
오랜 세월 장애로 힘든 삶을 살아온 장애인도 아닙니다.
외로운 사람, 불치병자, 장애인들은 정말로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겸손하게 청한 기적은 주님께서도 마다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들에게는 기적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의 표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도 아닙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없어도 되는 사람들이며,
하느님보다 세상의 사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들이 하느님 사랑의 표징을 청할 리 없고,
다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증명해보라고 요구할 뿐이고
증명해보여야지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겠다는 태도지요.
겸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래서 사랑도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표징,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실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는 본래 회개할 마음이 없던 사람입니다.
하느님 뜻이 자기에게 내려졌는데도 못들은 척하고 도망친 자입니다.
스스로 회개하려 하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어쩔 수 없이 회개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제 그 자신이 회개를 하고,
니네베 사람들도 회개케 한 사람으로서 회개의 아이콘이 되었는데
사실 요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기적이 하느님의 표징이 아니고,
회개가 하느님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지 않으셨으면 절대로 회개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주님께서 나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하셨다고 얘기하지요.
회개는 프란치스코가 해야 하는 거고,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회개를 했지만
주님께서 회개케 하지 않으셨으면 스스로 회개치 않았을 것임을 잘 알기에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세속에서 성공을 꿈꾸고, 세속을 너무도 사랑한 프란치스코였기에
주님께서는 프란치스코가 전쟁에 나가 패하고 포로가 되게 하시고,
중병에 걸리게 하시고 전쟁터에 또 나가려는 프란치스코를 주저앉히셨지요.
그리고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거부하던 나병환자를 통해서
자기가 완전히 죽는 회개를 결정적으로 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겁니다.
저도 그래요. 제가 조금이라도 회개했을 때는 하느님께서 다 하게 하셨지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할 죄인들이라면
기적이 하느님의 표징이 아니라 회개가 하느님의 표징임을 알아야겠습니다.
22일부터 하는 일반인 행진은 30명 정도의 행진이고, 얻어 먹고 얻어 자기에 경비가 들지 않지만 젊은이 행진은 숙식을 다 공동경비로 해결해야 하기에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런 젊은이들의 행진이 기특하다고 생각되고, 이 취지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조금씩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