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하늘나라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오늘 하늘나라 신비를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하락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 나라 신비를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 탓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됩니까?
하늘나라를 알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면
하느님 나라를 알게 하기 위해 비유를 써야 하는데
모르게 하기 위해 비유를 쓴다고 하시니 말이 되고,
차별이 없어야 할 분이 차별을 하시니 말이 됩니까?
하느님도 그렇고 주님도 그렇고 차별을 하여
누구는 하늘나라 신비를 알게 하고 누구는 모르게 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하늘나라 신비도 똑같이 드러내 보이시지만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없는 사람은 못 보는 거고,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들려줘도
귀가 있는 사람은 듣고, 없는 사람은 못 듣는 거지요.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면 들을 귀와 볼 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건데
귀는 있지만 들을 귀가 없고, 눈이 있지만 볼 눈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런 말도 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귀와 보지 못하는 눈도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어떤 귀와 어떤 눈이 이런 귀이고 이런 눈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탐욕의 귀와 눈, 교만의 귀와 눈입니다.
실상 우리는 사랑으로만 보지요.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시들하고 무관심하여
눈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사랑 대신에 욕심과 교만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욕심은 욕심내는 것에 집착하여 다른 것은 무관심하게 되고,
교만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관심하고 깔보게 되지요.
그러므로 하늘나라 신비를 아는 것의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차별로 배제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하늘나라 신비 학교가 있는데 입학조건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신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입학이 허가됩니다.
하늘나라 신비를 조금이라도 알고픈 사람에게만 허락이 되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보다 신비를 더 사랑하는 이에게만 허락됩니다.
당연히 하늘나라 신비를 개떡같이 여기는 사람은 허락이 되지 않고,
세상 욕심 때문에 하늘나라 신비가 눈에 들어오지 사람도 자격미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충족시킬 수 있는 거지요.
그러기에 아주 마땅한 조건이기도 하고요.
신학교나 수도원이 바로 이 신비의 학교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이 신비의 학교라 할 수 있는데
하늘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는 안 되겠지요.
하늘나라 신비를 배우기보다는
신부라는 직업이 좋아서 신학교 입학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요.
하늘나라 신비를 배우려하기보다는 신학이나 배우려는 사람도 안 되겠고요.
우리 모두 하늘나라 신비 학교에 입학하여
거기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