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오늘 주님께서는 주인을 위해 깨어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밸이 꼬여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말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만 주인을 위해서 깨어있어야 하는 것인가?
주인은 종에게 깨어있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세상의 주인과 종의 사이에는 종이 주인에게 깨어있고,
주인은 종에 대해서 무신경해도 되고 그런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누가 더 깨어있을까요?
우리가 주님께 더 깨어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더 깨어있으실까요?
주님이 세상의 주인들과 같다면 당연히 우리가 주님께 더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전혀 깨어있지 않으실 터이지만
주님은 그런 분이 결코 아니시고, 아니시어야만 하지요.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깨어있지 않으시다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깨어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훨씬 더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어머니와의 사이 그 이상의 것이지만
우리와 어머니 사이와 비교하면 그래도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깨어있는 것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더 깨어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다 어머니에 대해 신경 쓰는데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깨어있으시고,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다른 것에 더 신경 쓰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깨어있으시지요.
언젠가 제가 아는 새터민 아이가 아이를 낳고 난 뒤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열아홉 살에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가 아이를 낳은 셈인데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한 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이 드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가 깨서 바스락 거리기만해도 깨더랍니다.
그것이 그렇게 신기해서 저에게 얘기하는데
더 신기한 것은 그렇게 깨어도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의 위대함이고 사랑의 힘이며
엄마의 깨어있음이고 사랑의 깨어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마보다 하느님은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그러기에 더 사랑으로 우리에게 깨어있으시다고 말하는 것은 군소립니다.
아무튼 주님은 우리보다 더 우리에게 깨어있으시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이상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종의 식사에 주인이 시중드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본래 하느님과 우리의 사이는
주인과 종의 사이이고, 그래서 우리가 더 깨어 있어야 마땅하지만
사랑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고 크시기에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늘 더 깨어 있으시면서 온갖 시중을 우리를 위해 드신다는,
달리 말하면 우리의 온갖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우리의 기도에 늘 깨어있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깨어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