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없도록 주의하여라.”
저는 오늘 복음말씀 중에서 업신여긴다는 우리말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우리말 ‘업신여기다’는 한자어 ‘무시無視'와 같은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없이’와 ‘여기는’이 연음이 되어 그리 된 말이라는 거지요.
무엇이 분명 있는데 그것을 없이 여기는 것이 업신여기는 것인데
무엇을 없이 여기느냐 하면 큰 것, 큰 사람은 없이 여기지 않고,
작은 것, 작은이들은 있어도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없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너나할 것 없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님 말씀에 충실하여 작은이들을 사랑할 때
이 때 작은이들은 두 가지입니다.
존재적으로 작은이와 숫자적으로 작은이입니다.
존재적으로 작은이란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너무 볼품이 없거나 어떤 면에서건 존재의 영향력이 거의 없어서
보자고 해도 볼 것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늘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만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 참 사랑이라면 크기를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그대로 사랑하는데 사랑이 없을 때는 커야지만 보이지요.
그런데 한 번 사랑을 해보십시오.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고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사랑 없을 때는 안 보이던 이름 없는 작은 꽃도 눈에 들어오고
그 작은 꽃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하고 대단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큰 나무와 수풀 가운데 수줍게 피어 있거나
콘크리트 틈 사이에서 용케 피어나거나 하면
그 아름다움이, 그 생명력이, 그 겸손함이 정말 대단하지요.
다음으로 사랑을 하면 숫자적으로 작은 것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한 마리 양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이 비유에서 한 마리는 한 마리라고 해서 무시되지 않고
아흔아홉 마리 때문에 무시되지도 않으며
그 한 마리가 멋대로 길을 벗어났을지라도 무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숫자적 폭력을 자행합니다.
흔히 말하듯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같이 음식점에 가서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은 것을 먹는데
혼자 다른 것을 굳이 먹겠다고 하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거나
그냥 같은 것 먹으라고 밀어붙이는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집안의 중요한 것을 들여놓거나 시간표를 공동으로 짤 때
한 사람의 의견을 쉽게 무시해버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입니다.
그런데 비록 다수결에 따라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사랑으로 그리 하는 것이라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 그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매우 미안해 할 것이고,
그 의견도 좋지만 이 의견이 나아 채택한 거라고 해명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한다면 한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한 사람도 사랑치 않는
그런 우를 저처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