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에 오시면
아마 국론을 분열시키는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대놓고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얘기하시지 않습니까?
권력을 잡은 사람은 거의 누구나 자기가 한 얘기나 하고자 하는 것에
모든 사람이 다 좋다, 다 옳다고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국민의 뜻에 어긋나도
그것이 불의하다고 얘기하면 국론을 분열시킨다고 분노를 합니다.
그런데 국론이 왜 통일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왜 자기 주장이 국론이고,
더구나 불의한 것이 어찌 국론이 되어야 합니까?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왜 국민이 반대를 하면 안 되는 것이고,
왜 국민이 반대를 하는데도 대통령의 뜻이 국론이라고 하는 것이며,
더구나 불의하기에 반대하는데 왜 국론을 분열시키는 거라고 합니까?
지금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따라야 할 것은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따라야지,
국민이 대통령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대통령이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아직 전체주의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런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오만불손한 태도입니다.
더구나 우리 신앙인은 대통령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고,
미국이나 중국의 뜻은 더더욱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지금 아주 민감한 싸드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인데
얼마 전에도 제가 걱정을 했듯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극우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세상을 전쟁의 위험에로 몰아가고 있으며
싸드나 강정 해군기지도 다 이런 흐름에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반대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가 있는데
I. S나 탈레반처럼 폭력주의적인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시민 단체들처럼 시위나 반대 운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우리 신앙인의 경우처럼 예언자적인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전하라고 보내신 예언잔데
예수님 말씀처럼 고향에서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는 어디서고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다수와 권력자를 반대하는 반대 받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의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할 때
시므온이 예수님과 마리아의 미래와 관련하여 예언을 하지요.
아들인 예수는 남을 일으키기도 하고 걸려 넘어지게도 함으로써
일어난 이들에겐 칭송을 받지만 넘어진 이들에겐 반대 받는 표적이 되고
그런 아들을 보는 어머니 마리아는 가슴이 꿰찔리는 고통을 당할 거라고.
사실 이로 인해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2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 부모의 애를 태움에 왜 그러냐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몰랐냐고 면박을 받으시고,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된 것인지 아들을 보러 왔을 때는
누가 내 어머니냐, 나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어머니라고
가슴에 못을 박는 말씀을 마리아는 들으셨지요.
만약 마리아가 계속 반대를 하셨다 해도 아마 예수님은 오늘 복음말씀처럼
인정에 매이지 않고 분열도 무릅쓰고 가야할 당신의 길을 가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인간 간의 평화는 거짓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평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셨는데
불의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정의로운 평화를 주러 오셨음을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