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녀 모니카 (1854)
작가 : 에리 쉐퍼 (Ary Scheffer:1795-1858)
크기 : 켐퍼스 유채 :145 X 110Cm
소재지: 프랑스 빠리 루브르 미술관
8월 27, 28 양일간 교회 전례에서는 드물게 어머니와 아들 축일을 지내게 되는데 바로 교회 대단한 석학인 성 아우구스티노와 어머니이신 성녀 모니카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교회 학자이기 이전 세계 삼대 철학자의 한분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철학이 교회에 미친 영향 역시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대단하다.
그런데 이 성인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어머니이신 성녀 모니카이시다. 교회 역사에서 모자간에 나란히 성인이 되신 분은 그리 흔치 않으며 특히 두 분은 하느님을 향한 인생 여정에 있어서도, 모자관계 안에서 영적 성장을 함께 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독일 함브르크에서 초상화 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화란으로 이주했다. 어릴 때부터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부모에 의해 암스텔담 미술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후에 프랑스에 이주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을 때 낭만주의가 두각을 드러낼 때었으며 작가는 여기에 전적으로 심취해서 단테나 바이런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내용을 많이 그렸다.
낭만주의 예술은 17,18세기의 프랑스에서 확립된 고전주의 예술에 이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서구에서 나타난 예술사조이다.
당시 서구 유럽은 산업화 과정으로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개인주의화가 두드러지면서 비인간화, 사회 규격 및 획일화 등의 현상들이 극명히 나타나던 때이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한 바람직하지 못한 견해를 가졌던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표현이나 참된 자아의 개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합리적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자발성을 예술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낭만주의 작가로서 문학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을 작품화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가 추구하던 이상을 낭만주의 표현으로 관람객들에게 따스한 인간적인 정감에 빠져들게 만들어 감성적인 감동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359년 오늘 북아프리카 알제리아에 있는 타가스테라는 도시에서 지방관리인 아버지 파트리치우스와 열심한 크리스천인 모니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오로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인간으로 점찍었는데, 아들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의 이런 욕구를 기대 이상으로 충족시킬 만큼 유능하고 똑똑했기에 아버지의 기대와 기쁨은 대단했고, 오늘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부모들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유능한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카르타고로 아들을 유학 보냈다.
여기에서 부터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의 뜻과 다른 새로운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젊은 날에 있을 수 있는 방탕에 빠져 어느 여인과 동거를 해서 사생아를 낳을 처지가 되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노는 당시 명예와 출세라는 두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수사학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일반 젊은이들이 빠질 수 있는 관능의 늪에 빠져 양다리를 걸친 삶을 살았다.
이런 처지에도 그의 명성은 당시 수준에서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이던 로마 제국에까지 퍼져 그는 밀라노 왕실 학교의 교수로 발탁될 만큼 출세의 정상을 달리게 되었다.
그는 지적인 욕구의 충족에서 얻은 명성과 당시 마니교라는 밀교에 심취하면서 정신적 위안을 찾고자 했으나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충만감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심한 허탈감이었다.
어느 날 이런 공허한 심정으로 정원을 걷고 있을 때 자신의 인생 진로를 바꿀 수 있는 충격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것을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녀 모니카 (1854)갑자기 나는 근처 정원에서 한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라며 거듭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이런 말로 하는 게임이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게임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성서를 펴서 읽으라는 소리가 아마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당신으로부터 온 거룩한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성서를 펴자, 내 눈에 들어온 첫 말씀은 성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한인 로마서 13장 12절의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이 성경을 보는 순간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져서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 나의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나의 의심덩어리들과 두려움들은 끝났습니다. 나는 친구 알리피우스에게 가서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읽은 것을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친구에게로 끌려갑니다. 그는 이 말을 자기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간다. 나 역시 하느님께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특별한 신앙 체험 후 그는 밀라노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오로 부터 세례를 받게 되는데 그때의 감동을 고백록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나는 이제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친구들과 함께 세례 준비를 했습니다. 오 내 마음의 하느님, 그러한 기쁨의 날들은 나에게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읽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교회에서 당신의 시편들을 노래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나의 이전(以前) 유혹들은 없어졌습니다. 그 유혹들 대신에 나의 협조자, 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387년 모니카 성녀가 임종 전 회심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와 오스티아 집 정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영적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모니카는 더 없이 감사하며 기뻐했다.
아우구스티노는 회심 후 자신의 세례 결심을 어머니 모니카에게 전했을 때의 감동을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우리는 나의 어머니께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오, 나의 하느님, 어머니가 얼마나 즐거워 하셨으며, 또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는지! 당신은 어머니의 모든 기도에 답하여, 어머니가 지금까지 청하거나 생각한 것 이상을 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결혼이나 돈, 권세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는 당신, 내 영혼의 하느님, 내 사랑의 하느님, 내 삶의 하느님이신 당신만을 원했습니다.
이 장면은 바로 아우구스티노의 세례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해 로마 근처 오스티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며 모자간에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오스티아 항구 가까이 있는 저택의 정원에서 모자는 석양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 두 번의 어머니였다. 자궁으로 이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나게 만든 어머니이고, 그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으로 방탕의 늪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천상 생명으로 태어나게 만든 어머니이다.
모니카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모니카는 이승의 인연에서 벗어난 처지이기에 육신의 어머니로서 보다 천상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아들을 바라보는 승화된 사랑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손을 잡고 있으나, 그의 시선은 이미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모니카에 있어 아들의 세례는 너무도 벅찬 감격이며 새로운 생명의 체험이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하신다.
“내 아들아, 내가 이 세상에서 왜 더 머물러야겠느냐? 내가 오로지 원했던 것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단다. 그것을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고 또 지금까지 내가 청했던 것 이상을 주셨단다. 이제 나는 그분께로 갈 준비가 되었구나.”
모니카는 육신 안에 놓여 있지만, 그의 영혼은 너무 정화되었기에 그의 모습은 눈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반면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그는 아직 정화가 필요한 인간이기에 그의 옷은 육신의 상징인 붉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둘은 하느님 안에 다시 만났기에 더 이상 헤어질 수 없음을 확인하는 듯 손을 꼭 잡고 있다.
모니카는 병이 들어 며칠 후 56세를 일기를 하느님 품으로 갔다. 모니카는 임종 전 아우구스티노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감회를 표현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가 나를 묻을 곳은 바로 이탈리아 이곳이란다. “내 몸이 어디에 묻히든 상관없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네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미사 때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을 기록한 후 다음과 같은 자신의 정화된 감회를 남기고 있다.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옛스럽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신 당신을 늦게서야 사랑했습니다. 당신을 너무 늦게 사랑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내 안에 계셨으나 나는 밖에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밖에서 찾으려 했으며, 당신이 만드신 사랑스런 피조물들로 나의 마음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나는 당신을 찾지 못했지만 그것들은 당신의 힘이 없이는 전혀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 외에 불휴의 명작인 신국론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고 도외시하며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이 지상도시를 이루었고, 자기를 희생하며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 도시를 만들었다.” (신국론:De Civitate Dei 413-426)
성인은 이 두 사랑이 인간 안에 공존하는 사랑의 형태로 보면서, 전자에서 사사로운 사랑이 나오고(Amor privata), 후자에서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 이 나오는 것으로 보며,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 전자는 미완성의 사랑, 후자는 완성된 사랑으로 보았다.
모니카와 아우구스티노 모자는 이 장면에서 완성된 사랑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아버지 파트리치우스 역시 아들을 끔찍이 사랑해서 최선을 다해 그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지상의 존재로서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엄청난 뒷바라지를 했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지천으로 만날 수 있는 부모들의 모델, 이 세상에서 성공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부모의 최고 임무로 여기며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 부모상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에 대한 집념과 정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들이 사춘기가 될 무렵 그를 공중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벌거벗은 남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들에게 성적 쾌락의 중요성을 교육시킬 만큼 자기 수준대로 아들 교육에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국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미완성 상태의 물거품 같은 허망한 사랑이며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모자의 만남 안에서, 천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완성된 사랑의 모델을 보게 된다.
부모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보면서 나의 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지상의 행복을 모든 것으로 여겨 자녀를 대하는 파트리치우스와 같은 부모인지, 아니면 완성된 행복인 천상 세계의 수준으로 자녀를 대하는 모니카와 같은 부모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가정의 행복은 자녀 교육이 중요한 내용인데, 행복하기 위해 자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떤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면서, 서로 손을 잡고 천상을 같이 바라보는 모니카와 아우구스티노 모자의 모델이 오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가정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인간적인 모자 관계에서 천상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성화 이전 인간 삶의 아름다운 관계를 표현한 것이기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