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끔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특히 루카복음의 주님은 더 그러하신 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에게 심한 말을 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라고.
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주님의 그 거룩한 입에서
어떻게 저런 심한 말, 아니 험한 말이 나올까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가 아니라 ‘불행하여라, 너 김찬선아!’라고
저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뿐 아니라
저에게도 저주를 퍼부으시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입니까? 정말 저주를 퍼부으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그럴 리 없으시지요.
아무리 코라진이 잘못하고 제가 잘못한다고 저주를 퍼부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자세히 잘 보면
‘불행하여라!’이지 ‘불행해져라!’가 아닙니다.
불행해지라는 것은 저주이지만 불행하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지요.
그러면 저주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정확한 상태를 진단하고 알려주시는 고언苦言이며
이런 상태를 빨리 고치지 않으면 진짜 불행해질 거라는 경고이고,
그러니 빨리 고치라는 충고이며 애원입니다.
이는 초기 암 상태에 누가 있는데 아직도 술 담배를 먹고 있으면
그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고치라고 하는 의사의 말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모든 불행선언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말이며
저주가 아니라 경고성 충고요 애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가 잘못이라 하시고 뭐를 고치라고 하시는 겁니까?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잘못을 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잘못이고,
그것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감추거나 오히려 위선하는 잘못이며,
더 나아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못하게 하는 잘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좀 특별한 지적을 끝에 덧붙여 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불행선언은 회개하지 않는 것,
기적을 보고서도 회개치 않는 완고함에 대한 것인데
오늘은 받아들이지 않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건 하느님의 말이건 아무 말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이건 하느님이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잘못입니다.
그런데 왜 못 받아들이고 이것이 왜 불행입니까?
어떤 사람이 못 받아들이고 어째서 불행한 것입니까?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받아들일 여백이랄까 공간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불행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합니다.
오직 자기로만 가득 차 있고 자기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이나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특히 아픈 말이나 충고를 하는 사람은 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아픈 말과 충고를 사랑으로 바꿔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며,
그래서 사랑 때문에 아파하며 해주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영혼의 병을 고치고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노치는 것이며,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불행한 줄도 모르는, 아! 안타까운 불행.
주님은 오늘 이것을 안타까워하시고 한탄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