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께서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실 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돈을 달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며 성령을 주시면
여러분은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왜 이렇게 질문을 하느냐 하면 같은 내용의 마태오복음은 성령을
꼭 짚어 얘기하지 않고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로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루카복음은 마태오복음처럼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거라고
그저 일반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그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굳이 꼭 짚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돈 대신 성령을 주신다면 감지덕지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돈을 달라고 청한 적이 거의 없고
십여 년 전부터 제가 화살기도처럼 자주 하는 기도가
“오소서. 성령님. 저를 당신 사랑의 불로 태우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시면 왜 최고의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열정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두려움이 없어질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고통을 무릅쓰고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치명적인 상처까지 치유될 겁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어느 것보다도 완전한 만족을 줄 겁니다.
성령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것을 받게 되니
우리가 청하면 어련히 성령을 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돈 대신 성령을 청하는 제가 성령 대신 돈을 청하는 분들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산다고 저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돈을 청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제가 돈을 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족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돈이 절실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여러분은 살아가다보면
돈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기에 저는 여러분이 돈을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전혀 속물스럽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절실한 가난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충분히 있는데도 욕심 때문에 돈을 더 달라는 분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이 돈보다도 성령을 더 원하는 분이 되면 좋겠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돈은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만
성령은 만족을 채우는 것이고
돈은 만족을 모르고 더 욕심을 부리게 하지만
성령은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완전한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돈은 꼭 필요한 만큼만 주십사고 청하고
성령을 꼭 주십사고 청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