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나병환자 10 명이 치유 받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중 1 명만 감사드리러 오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그런데 이 한탄은 어떤 한탄입니까?
서운함, 분노와 같은 안 좋은 감정에서 나온 한탄입니까?
아니면 안타까움, 연민과 같은 사랑에서 나온 한탄입니까?
만일 이 한탄이 서운함, 분노에서 나온 한탄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는 사랑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를 보답으로 받고자 하신 사랑이고 그런 거라면
예수님의 사랑도 결국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우리의 사랑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왜냐면 저도 감사를 바라고 사랑하는 경우 많은데
감사를 싹둑 잘라먹으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고
감사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르지요.
반면 조그만 사랑인데도 그렇게 감사를 하면
나의 사랑이 그렇게 갚진 것이 되었음에 그 만족은 비할 데 없지요.
사실 사랑에는 감사보다 귀한 보답이 없습니다.
실제로 사랑이 너무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선물로 표시하려고 하면
내 사랑이 그까짓 선물 받기 위해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쁜데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보답을 하겠다고, 그것도 돈으로 하겠다고 하면
내 사랑이 마치 모욕을 당한 듯 기분이 정말 더럽지요.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은 감사로 보답해야 최고의 보답이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감사를 바라는 것이 최고의 욕심입니다.
그런데 욕심이라면 결핍이 있는 것이고
결핍에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거나 적어도 참된 사랑이 아니지요.
사랑이 참되면 참될수록 사랑 그 자체로 만족이고 충만이니 말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받은 사람은 감사를 할 때,
아니 감사가 차고 넘칠 때 만족이고 충만입니다.
감사는 사랑이 차고 넘칠 때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받은 사랑이 차고 넘치지 않으면 감사는
나오지 않거나 미지근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받은 사랑이 차고 넘치고
받은 사량 때문에 너무도 행복한 사람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한탄하신 것은 당신의 사랑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병의 치유가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주님께서는 왜 나에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냐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찬양 드리러 오지 않았냐고 하시며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러 온 이방인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감사를 가져다주면 사랑을 하는 이나 받는 이 모두를 행복케 하지만
사랑과 감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행복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사랑도 감사나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발생하고
그래서 구원이 발생하는 사랑이어야 하며
감사를 넘어 오늘 이방인처럼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찬양합니까?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과 구원을 발생케 하는 사랑입니까?
이것을 성찰하는 오늘 연중 제 28 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