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죽음으로 자기가 완전히 끝장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형태로 영생 내지는 자기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입니다.
지금 이 생은 죽지만 다른 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다른 생으로 태어날 수 있느냐입니다.
하느님도 없는데 누가 다른 생으로 태어나게 해준다는 것인지.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라면 자연의 이치란 어떤 것인지.
다른 하나는 자기는 죽지만 후손이 생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의 대를 잇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한국계 입양아들이 꽤 많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에서 입양이 안 되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한국에서 입양되지 않는 이유가 혈통주의 때문이고
자기자식들이 자기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미국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기에 자식의 대 잇기에 집착하지 않지요.
그리고 생명이 하느님께 있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한 조건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에 더 가치를 두지요.
그래서 우리가 입양하지 않는 우리의 아이들을 입양하고
심지어 장애를 가진 아이들까지 입양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의 대단한 사랑에는 무척 감동하면서도
우리의 사랑 없음과 혈통주의는 너무 부끄러웠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이 전부인 문화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 생명까지 걸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종족을 보존하고 씨를 퍼트리는 것이 전부인
동물의 세계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무척 중요하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나오듯 어떻게든 자녀를 생산해야지요.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은 다 끝이 있다.
그런 것이 끝나고 나면 다른 세상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 저 세상에 가면 시집장가 가는 일 없고
그러니 이 세상에서 맺어진 누구의 남편과 아내도 없으며
누구의 부모도 누구의 아들도 없다.
다만 하느님이 계시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관계의 재편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세상에서는 죽음이 없고,
대신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다.
하느님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결론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며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할 수 있으며
기쁨도 주고 슬픔을 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의 대를 잇는 것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 그 자체는 줄 수 없고
오직 생명의 하느님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 묵상하고 부활 신앙을 고백토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