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
자칫 잘못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분이시다보니
그러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내 옆에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저 하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시는 하느님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내가 편안할 때는 쉽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지만,
고통의 순간에, 죽음의 순간에
하느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예수도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자신을 버리신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십자가 고통에 함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느님의 모습을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곁에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하기 보다는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합니다.
자칫 이러한 생각은,
내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더 숨 막히고 답답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점점 더 무서운 하느님,
무자비한 하느님으로 그리게 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정의도 사랑이 바탕이 되어 나타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하나의 폭력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모습 다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비롯된 일들입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의 한계와,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고는
그 사랑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보니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생각보다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더 큽니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인간의 나약함, 인간의 한계 때문에
다시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옆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서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승천에 앞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온전히 믿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문득문득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사랑을 다시 떠올리고,
그 기억을 반복하는 순간
내 안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하루도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