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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평화와 자비


  지난 해, 교황님이 강조하신 '자비'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봅니다.

  어느 유명한 절 앞,커다란 바위에다 새겨놓은 '자비무적(慈悲無敵)'이란 인상깊었던 글귀 역시 제 마음 속 깊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프는 사람에게 결코 어떤 적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려니, 어쩌면 연민과 자비는 그 느낌과 실천이 하나이기에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맘에 들지 않는다 하여 담을 쌓고 심지어는 적을 만들고 지냅니까.  작게는 우리들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국가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우리나라 남북관계의 예를 보더라도 안타깝게 오랜 세월 평화와 자비의 관계가 아닌 적대관계로 걸핏하면 '종북' 따위로 치부해 버리기가 일쑤이니 그만큼 평화의 날은 요원하고 같은 부모 형제 자매끼리 이렇듯 오랜 세월 원수처럼 지낼 수 밖에요.    


  며칠 전 FMM(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나온 창설자 수녀님에 대한 전기를 얼핏 대하면서 제 마음에 전류처럼 흘러

들어 와 꽂힌 글귀 하나가 잊혀지지 않는군요:  "Compassion is a Human Bridge.(연민은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얼마 전에 경험했던 몇 가지 작은 일들이 바로 같은 내용이어서 여기 실어봅니다. 


                  *   *   *               *  *  *    


  대전 목동에서 서원식이 있던 날 오전 10시에 출발하리란 공동체 대열에서 떨어져 저는 진작부터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름아니라 이 기회에 대전에서 지내고 계신 석엘리사벳 할머니를 찾아뵈어야 겠다는- 할머니는 90에 가까운 연세에 꽤 오래전부터 대상포진을 심하게 앓고 계시어 외출을 전혀 못하셨고 몹씨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예전 서울에서 지내시면서 오랜 세월 성심원 후원회인 '미라회' 연책자 역할을 톡톡히 하시면서 나환우 분들을 도와 주셨고, 어느 때는 가끔 직접 시골에서 짜오신 참기름, 들기름이라면서 제게 주시곤 하셨지요.  그러셨던 할머니가 외출도 못하실 정도로 편찮으시니, 일부러 병문환을 가 드려야 할 판에 대전에 볼 일이 있을 경우 안찾아 뵙는 게 이상한 거죠.

  대전행 새벽 기차로 할머니 집에 도착한 시각은 9시 반쯤 되었을까, 라면을 끓여 먹었다해도 그 늦은 아침 궂이 새 밥을 지어주시는 할머니의 성화에 몇 수저를 또 뜰 수 밖에요.  자녀들은 직장에 나가 늘 혼자 계시니...얼마나 적조하실꼬!


  또 다른 이야기- 산청의 나환우 할머니와 진주의 빅토리아 할머니를 뵙고 올라오던 날 메시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예전 성거산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알고 지낸 천안 형제회 소속 한 자매님이 노환으로 영면하셨다는 아버님의 조문을 보낸 겁니다.  평소 절친으로 지내지 않아 구태여 장례식장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래도 서울로 가는 길이니 마지막 가시는 고인의 영정에 인사드리고 연도를 해 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렇게 천안의 장례식장엘 가니, 마침 평소 자주 연락이 있던 보나 엄마와 신부동 성당 신자들하며  천안 재속형제회 평의원들 모두가 같은 시간에 모여 있는 것이겠죠.  오랜 만남이어서 참으로 반가왔습니다.  함께 연도를 드리고 한동안 담소도 나누었습니다.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려 문자를 보냈던 주인공 자매님은, 저의 의외로운 출현에 참으로 반가운 기색이 역역했습니다.


  엊그제 있었던 큰이모부 장례식과 관련된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제게 단 하나 밖에 없는 외사촌 형이 있습니다.  저보다 1살 위로, 1류급 학벌에다 좋은 대기업에 순조로운 진급, 인정받은 실력을 바탕으로 중년 이후엔 내내 중소 기업 사장을 역임한 사회적으로 평생 잘 나간 형이지요.  그러나 평소 당신 숙부님들께나 사촌들과는 별로 신통치않은 관계였고, 그런 형의 존재를 정작 이모부 장례식에서 조차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알고보니 최근 위암 수술을 받아 칩거중이랍니다.  그렇지만 평소 마뜩잖은 형에 대한 이미지를 지우고, 한 번 안부라도 전해야 되겠다싶어 직접 통화는 안되고 문자로 안부를 물었죠.   의외로 고맙다는 답신이 왔고 고마움과 함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전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나 일에 있어서, 작은 생각 하나 차이에서도 완전히 다른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귀한 경험을 체득한 것입니다.  '연민'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는 귀한 다리 역할을 한다는 걸...내 쪽에서 먼저 상대방에게 진솔한 태도로 다가선다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건지 깨닫게한 작은 사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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