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노아의 홍수 얘기를 깊이 묵상하고 성찰한 분들은
사람이 악하고 죄를 지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왜
죄 없는 피조물까지 모두 멸하실까 의문을 가지셨을 겁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면 무고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깊은 의미로 이해하면 인간과 다른 조물이 다 한 운명의
운명공동체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 구원되면 다른 피조물도 구원되고,
인간이 멸망하면 다른 피조물도 멸망한다는 그 신앙 말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2장의 창조 얘기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신 다음 땅 짐승과 날짐승을 만들어
협조자로 주시고 인간에게 이름도 붙이고 돌보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1장의 창조 얘기에서는 더 강한 표현인데
땅 짐승, 날짐승에다가 물고기까지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이 악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뒤
보시고 좋다고 하신 그 선한 피조물들을 악하게 다스리고,
악하게 다스리면 인간과 함께 같이 멸하게 된다는 거지요.
오늘날 생태신학에서 창세기의 이런 얘기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지요.
특히 다스리라는 말, 지배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인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을 하느님 뜻대로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뜻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악을 저지를 때 공멸한다는 뜻이지요.
임금이 나라를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제멋대로 다스리면
자기도 망하고 나라와 백성도 모두 망하게 되는 것과 같고
가정으로 치면 부모가 먼저 똑바로 살고 자식을 하느님 뜻대로 잘 키우면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세상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 한 가족이 모두 잘못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이 본래 악하니 인간 때문에 땅을 멸하지 않고
어떤 생물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공동운명체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이것이 어떻게 보면 구약의 모순이며 또한 우리의 삶입니다.
공동체성/연대성과 개별성을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이지요.
공동운명의 공동체이기에 연대책임감도 가져야 하지만
죄와 악의 사슬은 끊어야 하는 개인책임감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성숙한 공동체성과 개별성은 반대와 모순이 아닙니다.
반대와 모순이라고 해도 사랑의 모순인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공동체에 대한 나의 무한책임감, 연대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하기에 개인의 악이 공동체의 악이 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가장家長, 성숙한 사랑의 가장은 아버지든 어머니든
자녀의 행복을 위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자녀의 불행까지 공유하지만
곤경이나 불행이 가족 전체를 덮치지 않도록 혼자 곤경과 불행을 떠안지요.
그러므로 인간이 본래 악하기에 땅과 다른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인간이 본래 악하기에 수없이 죄를 지을 터인데 그 때마다 그 죄의 벌로
살아갈 땅/터전을 빼앗는다면 인간이고 피조물이고 살아남는 게 없게 되니
살아갈 터전만은 빼앗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의지의 표현이고
악과 불행이 확장되는 것은 막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의지의 표현인 겁니다.
사랑에는 모순이 많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