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1 독서, 히브리서는 창세기의 얘기를 믿음을 중심으로 해석하는데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믿음의 사람들로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의 전례는 연중 4주간까지 히브리서를 계속 듣다가
5-6주간을 창세기 1장부터 노아와 바벨탑의 얘기까지 들은 뒤
이를 종합하는 차원에서 오늘 다시 히브리서를 듣는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히브리서의 창세기 해석이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제시한다면 잘 어울리는 것이지만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믿음의 사람으로 제시한 것은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바오로 신학의 믿음을 얘기하기 위해
좀 억지로 끌어다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히브리서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오늘 아주 심오하게 얘기합니다.
히브리서는 먼저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이란 말은
여러 뜻을 함께 담고 있는 희랍어의 표현이기에 바라는 것들의 보증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희망하는 것들의 실현’ 등의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근거’로 번역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희랍어 원문이 지니고 있는 그 풍성한 뜻을
굳이 어느 하나의 뜻으로 좁힐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망애信望愛3덕을 한 묶음으로 얘기하듯 믿음과 희망은 밀접합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믿으며 믿을 때 희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을 때 바라는 것을 얻게 되고(실현하게 되고)
그래서 믿음은 희망하는 것이 실현되리라는 보증 또는 확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바라고 희망한다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것이고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알 수 있잖습니까?
예를 들어 이미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기를 바라거나 희망하지 않지요.
그러나 말기 암 환자라면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만큼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바라는 사람이 희망을 하고,
희망하는 사람이 꿈을 꾸는 것입니다.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꿈 말입니다.
그리고 앞서 봤듯이 믿음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보증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으며 우리는 바람과 희망을 아예 접어버리니까요.
이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은 미래 희망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의 근원과 원리에 대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근거라는 말도 맞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왜 존재하고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물을 때
이에 대한 답을 믿음이 준다는 뜻입니다.
곧 나를 비롯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답을 우리 믿음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무 것도 없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싹이 돋을 때
우리는 뾰족 나온 작은 싹을 보고
‘아하! 그 뿌리가 분명 땅속에 있을 거야.’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겨울에는 아무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계절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이제 한 겨울에도 봄을 기다리며
새 싹이 돋아날 거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질 것입니다.
새 싹의 근원뿐 아니라 계절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