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세아서의 말씀은 사순절 독서 치고는 밝고,
어제와 그제의 독서와 비교하면 반전이며 연관성이 있습니다.
어제와 그제의 독서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하셔도 듣지 않아 결국 망하게 될 거라는
그런 경고와 나무람의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 예언자는 이제 하느님 분노가 풀려
다시 사랑해주실 것이고 그래서 사랑받는 이스라엘은
이제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뿌리를 내릴 거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던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그런데 이 말을 우리가 곧이곧대로 알아들으면 안 되겠지요.
우리 인간처럼 내 말을 안 들어 화가 나면 사랑을 거두다가
뉘우치고 말을 들으면 화가 풀려 다시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우리의 죄나 선행과 상관없이 늘 똑 같고 꾸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가 뉘우치는 것은 하느님의 화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뉘우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 사랑을 사랑치 않아 하느님 사랑을 원치 않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뉘우쳐 하느님 사랑을 사랑하고 원하는 내가 됨으로
하느님 사랑을 받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느님 사랑을 왜 원치 않았었고,
그러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원하게 된 것입니까?
하느님 사랑이건 이웃 사랑이건 상관없이 아예
사랑 감각이 메말라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랑이 밤 먹여 주냐? 사랑? 뭐 말라비틀어진 거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사랑을 원하기는 하지만
쉬운 사랑, 감각되는 사랑만을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으로는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없고
그래서 그런 사랑으로 대리만족하고 대리 사랑을 합니다.
술 먹어 운전할 수 없는 사람이 대리 운전하는 것과 같다 할까요?
사실 하느님 사랑을 느끼는 것 쉽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더 어렵지요.
반면에 너무 어렵게 사랑하려 하기에 원치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보다 자기가 사랑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랑도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은 받지 않고 하겠다는 교만한 사랑도 사랑 아니긴 마찬가집니다.
이는 마치 내가 하느님처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 받지 않고도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니, 하느님도 사랑 받고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도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으시지만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며 성자의 사랑을 받으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시며 성부의 사랑을 받으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으로서 주고받으시는 사랑입니다.
욕심으로 사랑할 수 없고 사랑에 독불장군 없으니
우리의 육적인 욕심과 교만이 완전히 깨지고 나야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원케 되고
사랑케 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