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고, 당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답니다.
그런데 실은 자유롭게 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왜냐면 진리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정 진리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진리라고 함은 모든 것의 원리와 이치로서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란, 그것도 쉽게 설명하기란 너무 어려운 것인데
진리란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원리요 이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理에 대해 깊이 있는 가르침을 주는 성리학이나 주역에서
기氣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모든 것은 존재하고 움직이게 되는데
이理는 이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원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존재의 원리原理에 따라서 존재들은 생겨나고
이치理致에 따라 모든 것은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자연의 이치에 따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며,
계절의 이치에 따라 잎이 떨어지고 돋아나는 법이지요.
이 이치와 이 법을 벗어날 때 벗어난 것은 죽게 되고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천리天理이면서 원리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만 우리는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하며,
이 진리를 벗어나고, 이 주님을 벗어나면서까지 자유로우려고 하면
죄를 짓게 됨으로써 오히려 자유를 잃게 되고 죽게 되겠지요.
두 번째는 진리의 말씀으로서의 진리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잘못 산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독불장군 식으로 사는 것.
정 반대로 이렇게 말하면 이랬다가 저렇게 말하면 저랬다가 하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은 둘 다 양 극단으로 잘못 사는 것임을 우리는 알지요.
그래서 우리는 제법 잘 산다는 뜻으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좋은 말이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말이지만 듣기 싫으면 좋지 않은 말이라고 하며 듣지 않고
듣기에만 좋은 말인데도 좋은 말이라고 하며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이라는 것이 진리와 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말씀에 머물라고 하시고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하시는데
하루 종일 어떤 말이 우리 마음에 많이 맴돌고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어떤 말이 마음에 남아있습니까?
저의 경우 새벽에 묵상하고 글을 올린 복음 말씀이 마음에 남지 않고
낮에 있었던 신자들의 듣기 좋은 말,
예를 들어 ‘신부님 오늘 올린 강론 참 좋았어요.’가 마음에 남아 있으면
저는 주님의 말씀에 머문 것이 아니고 그럴 경우
내일도 또 듣기 좋은 말 들으려고 할 것이며
그래서 듣기 좋은 말 들으려고 복음도 읽고 묵상도 할 것이고
그것이 저를 매이게 하고 부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평소 저는 눈치는 있어야 하지만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눈치가 있는 것은 사랑이지만 눈치를 보는 것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묵상하고 자기 마음에 남는 말씀을 나누는 것은 사랑이지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것은 두려움이거나
부자유스러움임을 저는 오늘 다시 묵상하고 여러분과도 나눠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