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처음에는 토마스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들은 토마스는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지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드레 뒤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삶.
우리는 어떤 면에서 참 불행합니다.
토마스처럼 예수님 부활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이 의심을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의심을 버리라는 꾸지람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통해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을 갖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이
무작정 믿으라는 말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성은 과학을 발전시켰고,
그 과학은 증명이라는 방법을 통해 발전해 왔습니다.
즉 우리가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증명을 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부활 사건은 안타깝게도
증명이 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즉 이성의 영역을 넘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믿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부활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네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활의 모습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눈에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부분은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인데,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지만,
무덤 가에서 만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랑했고,
그렇게 따랐던,
스승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뵙고 제자들에게 가서 전합니다.
제자들은 막달레나의 말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달레나의 말을 이미 들은 상태이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을 곧 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역시 처음에는 의심하였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2000년 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부활에 대한 소식을 우리 안에 간직할 때,
우리도 삶의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불완전하기에
우리에게 전해진 부활 소식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지 못한다고 해서 내버릴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해되지 않고,
온전히 믿을 수 없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을 때,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