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니코데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런 대답을 듣고 처음에는 무슨 이런 멍청한 대답이 있나 생각했고, 그래서
‘아니, 늙은이가 아니고 젊은이라면 다시 어미 배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거며,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건가?’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생각하니 니코데모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지금의 나를 더 나은 나로 바꾸려는,
곧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의지가 없어지고,
40만 넘어도 좀처럼 자기를 바꾸려고 하지 않으니 니코데모로서는
자기같이 늙은이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말이겠지요.
사실 저만해도 젊었을 때는 저를 바꾸려고 기를 썼습니다.
성격이나 습관을 바꾸려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됨됨이를 바꾸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못난 나를 잘난 나로 바꾸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못난 나라니?
우리 어머니가 나를 잘못 난 거라는 말인가?
아니면 하느님이 나를 잘못 나신 거라는 말인가?’
그러면서 하느님이 나를 잘못 나신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실수로 나를 이렇게 나신 것이 아니라
뜻하신 대로 낳으신 것이니 이런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바뀌었지요.
그러니까 처음엔 나를 바꾸려다가 나중엔 바꾸려는 생각을 바꾼 겁니다.
바꾸려는 생각을 바꾼 것,
그런데 이것이 잘한 것일까요?
바꾸려는 의지를 포기한 것, 이것이 잘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바꾸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에 대한 불만이나 미움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없어야 합니다.
젊었을 때의 저는 저에 대해서 불만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저를 사랑하지 못하고 늘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욕심과 미움 때문에 나를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욕심과 미움 때문에 나를 바꾸려는 것은
자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뜯어고치려는 성형 미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꿔야 한다면 사랑 때문에 바꿔야 하고,
더 사랑한다면 나를 바꾸는 정도가 아예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을 위해서 나를 바꿔야 하고
더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위해 새로/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육신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영이 새로 태어나고 그래서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새로 태어나고 영혼이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육의 영을 지니고 있다면 육의 영은 죽고
주님의 영이 내 안에 오시어 머무시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내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육의 영은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기에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을 두려워하게 하지만
주님의 영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느님만 보고
담대하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게 하지요.
의회지도자들의 위협을 받자 제자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고 사도행전을 기술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 아니면,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굳이 바뀔 필요 없이 지금 그대로여도 됩니다.
지금 그대로여도 충분히 사랑할만한 나이고 사랑해야 할 나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