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심판을 받을 것인가?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오늘 우리는 요구받습니다.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할 거냐고 요구받으면
우리는 당연히 구원을 선택하지 심판을 선택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면 심판을 받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심판을 받았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은 아주 당당히 구원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어떤 때는 무례할 정도로 우리에게 구원받았는지 묻는데
우리도 그들처럼 구원받고 있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구원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구원은 받아야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안 받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당신이 오셨다고 얘기하시니
하느님이 구원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는 게 되는 거지요.
오늘 주님 말씀을 분석해보면 주님은 마치 우편배달부와 같습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나 소포를 가져오면 그것을 우리가 수령해야하는데
우리가 수취인거부를 하면 아무리 배달이 되어도 수령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두에게 구원을 분명히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배달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확실한 구원배달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구원을 수취인거부를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취인거부를 한다면 왜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첫째는 구원이 구원을 필요치 않은 경우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치 않고,
충분히 행복치 않더라도 이 세상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지어 신자들조차 하느님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
세상에서의 구원, 세속적인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을 받지 않고 자기가 얻으려는 경우입니다.
구원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얻는 거라는
그런 믿음과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원치도 찾지도 않겠지요.
사실 하느님의 구원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구원을 그저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해 봐야 하는데
구원을 받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선택하지 않음이 곧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선택하지 않음이 곧 심판을 선택한ㄴ 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도 심판을 선택치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선택치 않는데 하느님께서 주시시기에
어쩔 수 없이 심판 받는 거리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을 좋아서 선택치는 않지만 선택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께서 심판치 않으시는데도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얘깁니다.
사랑의 충고를 미움의 꾸지람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고
은총으로 주시는 고통을 벌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간의 다른 오해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구원과 심판의 오해는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게 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