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필립보 사도에게 당신의 답답함을 토로하시고,
나무라시기까지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말을 듣는 필립보는 억울하고
그래서 답답하기는 예수님보다 필립보 사도가 더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을 보면 곧 아버지 하느님을 뵌 것이라니.
아무리 봐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데 이미 뵌 것이라니.
하느님 뵙는 거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 못 봤다고 나무라니 너무 억울하고,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고 나는 볼 수 없는 존재인데
그런데도 뵀어야 한다고 하시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니 필립보가 문제가 있는 제자처럼 요한복음이 얘기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이고 우리와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어찌 보면 다른 사도들이나 우리보다 더 큰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 말이 그저 한 말이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면
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우리 중에 이만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수도생활을 택하는 사람도 적지만 요즘 수도자중에도
이만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요즘 같으면 하느님 아버지를 뵙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열망만 있어도 훌륭하고
자기완성의 열망만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실로 요즘 세상을 보면 열망은 작고 욕망은 큽니다.
신자유주의가 과거 죄악시하던 세상욕망을 부추기고,
소비주의가 소유와 소비를 미덕이라고 미화하고 있기에
수도자라고 할지라도 이 유혹과 풍조에 휩쓸리지 않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스마트 폰이 나오면 아무리 수도자라고 해도
이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 하느님을 뵙고 싶은 열망보다 클지 모릅니다.
어찌 수도자마저 그리 될까요?
그것은 욕망을 이루는 것이 열망을 이루는 것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열망을 이루는 것이 욕망을 이루는 것보다 힘들고
그러기에 이루기 힘든 열망보다 쉬운 욕망을 택하기 마련이지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우리가 열망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망은 허무를 낳고 허무로 끝이 나지만
열망은 어려움 없이 이룰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이루기만 하면 어려움만큼 더 가치 있을 뿐 아니라
얻은 것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소유하기도 쉽고
소유 여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뵙는 것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뵙고 소유하게 되면 그 기쁨은 영원하고,
그 만족은 오늘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안다면
용기 있는 사람은 그 열망을 지닐 것이고
겸손한 사람은 그 은총을 청할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