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에서 뭔가 친숙하지 않은 모습,
어쩌면 어색한 모습이라고 함이 더 좋을 것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보통의 바오로 사도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기적을 행하하고 있고 그것도 어떤 흉내를 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에게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라는 장면인데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신 기적이나
베드로 사도가 마찬가지로 불구자를 일으킨 기적과 비슷하잖습니까?
그런데 보통의 바오로 사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보통의 바오로는 그저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인데
바오로 사도는 왜 기적을 일으켰을까,
주님을 믿게 하는데 무엇이 더 유효할까 생각해봤습니다.
말씀선포.
사랑실천.
기적행위.
얼핏 생각하면 기적보다는 말씀선포가, 말씀선포보다는 사랑실천이
하느님을 믿게 하는데 더 유효하고 나은 방식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기적의 방식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낮은 차원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긴 합니다.
기적이라는 특별한 표징이 없어도 우리의 사랑을 보고
하느님을 만나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이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랑도 참으로 훌륭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할 때, 다시 말해서 지금 나의 사랑을 생각하고,
너의 믿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나중에나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이 깨지고 사랑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교만을 깨고 사랑에 이르게 하기에는 나의 사랑은 보잘것없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영역을 하느님께 겸손하게 넘겨드려야 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 친구 딸이 교통사고로
생사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있었고,
저는 그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매일같이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가기 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부활에
아이도 같이 부활케 해주시기를 기도하겠으니
친구도 같이 그렇게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물론 제가 얘기하지 않아도 친구도 그렇게 기도했겠지요.
중국에서 돌아와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도가 없음을 얘기하는 것 때문에 친구가 힘들어 할까봐
전화도 못하고 차도가 있으면 스스로 전화하겠지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여 일 전 그 아이가 조금 의식이 있고 알아보는 것 같다고 하더니
며칠 안 있어 다 알아보고 옛날 기억도 다 한다고 친구가 알려왔습니다.
그리고 소식과 함께 교만을 깨고 은총을 체험케 하기 위해
그 힘든 시간을 하느님께서 주신 것 같다고 친구는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얘기했지만 제가 보기에 제 친구는 하느님 말씀을 늘 끼고 살고,
그래서 얼마 있으면 아들이 신부될 정도로 정말로 훌륭한 신앙인이지만
그런데도 친구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깨져야 할 교만은 참으로 크고,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기는 그만큼 어렵고 그래서 은총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사랑해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도 받는다는 뜻도 되지만
이 말씀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겠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씀도 되지요.
그런데 교만이 완전히 깨질 때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교만이 하도 크니 교만이 깨진 그만큼 사랑도 할 수 있으니
알면서도 깨지 못하는 우리 교만을 주님 친히 깨주시기를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