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시니
오늘 우리 묵상의 주제는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머무는가?
내 안에는 무엇이 머무는가?
또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 안에는 누가 있는가?
먼저 나는 어디에 있는지 보겠습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최초로 받은 질문입니다.
죄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 숨었을 때부터 받은 질문이지요.
그런데 시편 139편이 얘기하듯 주님을 피해갈 곳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 139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지요.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고,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술을 사랑하여 술집에 가 있어도 거기 주님 계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 있고,
우리가 여인을 사랑하여 여인 품에 있어도 그 여인마저 하느님 안에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 있으며,
우리가 일을 너무도 사랑하여 일에 파묻혀도 하느님은 내 행위 다 보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 안에서 무엇을 하지만
다만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일 뿐이고,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안에 있지 않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을 텐데 주님께서는 어찌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우리가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자식이 부모보다 친구나 애인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가
“이 괘씸한 놈 이제부터 용돈도 안 주고 밥도 안 줄 거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부모의 사랑보다 더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이 사랑을 거둘 리 없지요.
다만 사랑을 주셔도 그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시는데 왜 그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랑을 주셔도 그 사랑 필요 없다고 걷어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을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특히 연인을 처음 만나 사랑하게 되면 연인의 사랑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그래서 부모 사랑 없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사랑은 사랑할 때 받는 것이고,
그러기에 애인의 사랑은 애인을 사랑할 때 받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 때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약동하고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없을 때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마치 수분이 안 된 수박이나 무정란과 같기 때문입니다.
수분이 이뤄지지 않으면 씨도 생기지 않고 당연히 열매도 생기지 않으며,
수정이 되지 않은 달걀은 아무리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생기지 않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무척 열심히 하는데도
지치기만 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다면 내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지,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머무는지 먼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