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면 사랑하면 되지 무슨 군말이 그리 많으냐?
군대식으로 말하면 “까라면 까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식이지요.
정말 좋은 의미에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라는데 사랑할 수 없는 이유나 대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딴 것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사랑만 생각하고 사랑만이 모든 이유가 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군대식으로 사랑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자유에 사랑의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성립조건에 자유가 필수이고 그래서 결혼서약에서도
온전한 자유의사로 결혼하려는 것인지를 묻듯이
사랑도 누가 강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라도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명령한다고 하시고,
당신의 명령대로 사랑을 실천하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자유에 사랑이 본질이 있는데 사랑을 명령한다면 모순이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이런 뜻이 되는 것일 겁니다.
본래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뭣이건 명령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관계이지만
사랑을 당신처럼 하면 친구관계가 된다는 뜻일 겁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며
사랑 때문에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친구관계로 격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관계와 친구의 사랑을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제 생각에 친구의 사랑은 연인의 사랑과 사뭇 다릅니다.
연인의 사랑은 서로의 사랑에만 머물고
그래서 연인의 사랑에는 다른 사람이 끼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누가 끼어들면 그것은 사랑의 훼방이고
사랑이 서로에게만 향하기에 밖으로 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사랑은 이런 배타적인 사랑과 다릅니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가치를 공유하는 관계입니다.
가치를 공유하기에 사랑이 더 견고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가치실현을 할 힘도 커지고 강해집니다.
의기투합意氣投合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로 뜻이 맞는 일에 같이 나서게 되지요.
저의 친구 경우가 대부분 이렇습니다.
고향친구니 학교친구니 이런 친구보다는
어떤 의미 있는 일, 좋은 일을 저와 오래 같이 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결코 쉬운 일들이 아니고,
그래서 이 일들을 하면서 같이 겪은 어려움들이 크고 많은데
그 어려움들을 같이 겪은 것 때문에 친구 관계도 돈독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너무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존경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나를 끼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대통령이 자기 국정수행의 동반자로 나를 뽑아준다면
뽑혔다는 그 자체도 영광인데 일까지 같이 한다면 더더욱 영광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대통령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대통령 이상이신 주님이 나를 당신 일의 동반자로 뽑으신다면
우리는 대통령에게 뽑힌 것 이상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친구로 뽑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