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하시는데
이것을 볼 때, 때가 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인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주실 때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요한복음 17장은 돌아가시기 전 기도하시는 내용이니
영광스럽게 되시는 때와는 영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주실 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영광의 때가 아니라 수난의 때가 온 것이고
극도의 모욕과 수치의 때가 온 것이지요.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영광을 받고 싶으신 걸까?
영광을 받고 싶으신 거라면 우리가 받고 싶은 것과 같은 걸까?
물론 그런 영광이 아니지요.
당신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실은
당신이 영광스럽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위한 거지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기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기가 잘 되는 것이 부모에게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당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거기에
주님도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이유라면
어떤 것이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일까요?
권좌에 오르거나 사법시험에 붙는 그런 것과는 분명 다를 텐데
이런 세속적인 영광과는 다른 거룩한 영광스러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의 완수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영광스러워야 할 이유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고,
영광스럽게 되는 방법도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을 당하셔도,
영광은커녕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당하셔도 포기치 않으시고
맡으신 임무를 완성해내심으로써 얻으실 수 있는 영광입니다.
마라톤을 뛴 자의 영광은 그 고통 때문에 얻는 영광이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완주를 했기 때문에 얻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오늘 독서의 바오로도 이런 면에서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맡겨진 임무,
곧 당신에게 맡겨진 이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시고,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 지키게 하며,
당신을 보내신 분이 아버지임을 믿게 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도 에페소 신자들과 고별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내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할 바를 다했다고 얼마나 확신에 차 있습니까?
이렇게 자기가 할 바를 다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고,
그리고 이때 주님처럼 부활의 영광을 주십사고 청할 수 있을 겁니다.
저로 말하면 수도생활이건 선교건 마라톤이건
끝까지 다 했을 때 끝날 때의 영광이 있는 것임을 묵상케 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