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오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도밭이란 하느님의 기업이고,
여기서 각자는 소작료를 내야 할 소작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만 소작인이고 우리는 아닙니까?
우리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니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 포도밭의 소작인들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내야 하는 소작료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얘기하고 개신교 신자들이 충실히 내는 십일조입니까?
또 우리가 주일마다 내는 헌금이나 미사봉헌입니까?
이런 것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는 이것들로 충분하다고 하거나
이것 외에는 필요 없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일미사 참례가 제일 중요하고
그래서 주일미사 참례한 것으로 신자로서의 도리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상 주일미사 참례자가 20%대라고 하니
주일미사만 빠지지 않아도 충실한 신자이고
거기다 교무금과 헌금까지 잘 내면 훌륭한 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에 대해 냉철하게 성찰하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원하시는 것은 성당에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교무금이나 헌금을 내지 말고
그 돈으로 직접 이웃사랑을 실천하거나 자선단체에 헌금하라고 말입니다.
저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대다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것도 또 다른 극단이기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분명 이런 주장은 지금 우리 교회생활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곱씹어 볼 필요는 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생활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교회생활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생활 열심히 한다고 신앙생활 다하거나 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교회를 통해서나 또는 직접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소작료를 잘 바치는 것입니다.
이참에 저는 저의 수도생활과 저의 수도원의 삶도 성찰합니다.
사도께서 말씀하시길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하셨고,
성 프란치스코도 몸소 일하여 먹고 살되
일의 대가로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경우 애긍을 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수도자나 수도회가 돈벌이를 하면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수도자는 돈벌이가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
신자들을 대신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성금도 후원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생활 열심히 하는 수도자와 신자의 모습, 아름답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을 정성껏 바치는 모습, 이것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이 줄어들고
어떤 때는 자기구원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모습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런 눈으로 오늘 독서의 토빗을 보고
이번 한 주간 토빗기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나 토빗은 평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었다.”
이렇게 토빗은 감히 그리고 당당히 말하잖아요?
우리도 죽을 때 자만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