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주 화요일-2017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빛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하는 요한복음에서는 주님만이 빛이시고
그리고 세례자 요한만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의 빛이고 또 소금이라고도 하심은
제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거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광스러움이 더 크게 다가옵니까,
아니면 부담스러움이 더 크게 다가옵니까?
저를 보면 이렇습니다.
지금보다 한창 젊었을 때는, 그러니까 프란치스코처럼 되고 싶고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되고 싶었던 때는 이 말씀이 도전이면서도
크나큰 자극이 되어 ‘그래, 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고 했지요.
그때는 정말로 패기가 대단하여 세상 모두를 사랑하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씀이 영광스럽고 그러니 ‘답게 살아야지’라고도 하지만
저의 주제를 생각하면 부담도 되고 주저하게도 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고 적당히 이상적이고
적당히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다짐도 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소명이랄까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쉽지 않은 소명이고 과제이지만 조금 결이 다릅니다.
빛은 비교적 Positive(긍정적이고 적극적)한 것입니다.
빛은 빛이라는 것 자체가 밝고 긍정적인 느낌도 주지만
주님께서 선행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매우 밝고 긍정적인 것이지요.
다른 이에게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것이기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악행이 만연한 우리사회를 보면서
다 썩었다고 한탄만 하지 뭣을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 상태로 세상의 어둠이 너무 짙음을 한탄만 하는 겁니다.
나의 작은 선행으로 촛불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은 선행이라는 촛불로 세상의 그 짙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고,
이 위태위태한 작은 촛불은 세상의 광풍에 금세 꺼져버릴 거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의 작은 선행의 촛불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꺼버립니다.
그런데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촛불 하나를 밝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올려놓으라고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뜻은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고 자랑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번 광화문의 촛불처럼 용기 있게 만연한 악의 어둠과 맞서라는 뜻입니다.
소금도 세상의 악과 맞서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소금이란 것이 본래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사랑과 선행보다는 정의와 불의고발 차원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Negative(부정적이고 소극적)한데
그런데 달리 보면 선행보다도 더 적극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빛이나 선행은 병으로 치면 발병한 것을 고치는 거라면
소금이나 정의실천과 불의고발은 예방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사회가 이렇게 썩은 것은
우리가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때그때 바로 불의를 도려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종기가 생기지 않도록 살면 제일 좋지만
종기가 생겼다면 아직 작을 때 빨리 짜내는 것이 맞지요.
종기는 ‘호’해주기보다 짜주는 게 더 사랑이란 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둘 다 부담스럽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행위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수행해야 할 우리의 소명이고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