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공동체에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
오늘 복음의 비유, 곧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부로 구별하려고 뽑아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함은 물론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는 의미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해는 아니지만 오늘 얘기를 조금 비틀어 보겠습니다.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는 것의 의미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본래 밀과 같은 사람과 가라지와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하느님이 창조하신 선인 말고 악인이 있는 것은 원수가 그리 만든 것인데
그런데 ‘그 원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가라지를 덧뿌린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를 오늘 보려고 합니다.
우선 원수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닌 악신이겠습니까?
그렇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선신이 선과 선한 사람을 만들고
악신이 악과 악한 사람을 만들었다는 2원론의 이단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란 악신은 아니고 악령이던지 악한 사람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라지를 뿌렸다고 할 때 그 가라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꼭 악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이
악한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이면 앞에서 얘기한 2원론의 얘기이니
원수가 악한 사람을 창조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 악을 유포하고,
그럼으로써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이 되게 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 사람 중에서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는 어떤 사람이 선보다는 악을 퍼트리고
그럼으로써 공동체에 점점 악한 사람이 많아지게 하는 사람일 겁니다.
어느 공동체를 보나 그런 사람이 꼭 있습니다.
좋은 기운을 조장하고 좋은 얘기를 많이 퍼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디서 들었는지 공동체 내의 안 좋은 얘기를 많이 알고
그것을 퍼트림으로써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이것을 덕과 관련시키면 선덕의 사람과 악덕의 사람의 차이입니다.
덕德이란 선악善惡과 관련한 능력으로서
선덕善德의 사람은 좋은 말과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후덕厚德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후덕할 수 있으려면 선덕을 많이 지녀야 하는데
공동체 안에서 좋은 것을 많이 보고 그것을 많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악덕의 사람은 선덕의 사람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선덕의 사람은 좋은 것을 많이 보고 지니고, 행하게 되고,
악덕의 사람은 나쁜 것을 많이 보고, 지니고, 행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선에 대한 욕심과 가난의 차이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악덕의 사람은 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좋아하고, 선도 최고의 선만 좋아하고 욕심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선만 좋아하니 그만 못한 선은 다 악이 되고,
최고로 좋은 것만 욕심내니 그렇지 못한 것만 눈에 띠는 겁니다.
반면에 선덕의 사람은 선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이 선이시고 최고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 참된 선이시기에
인간에게서 그런 선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선이란 하나도 없는
최악을 늘 각오하고 그래서 공동체 안의 작은 선도 잘 발견합니다.
최선을 기대하고 욕심내는 사람이 악덕한 사람이 되고,
최악을 각오하고 인내하는 사람이 선덕의 사람이 됨을 묵상하는 오늘,
내가 바로 공동체에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가 아닌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