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죄지은 형제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마태오복음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은 루카복음과 달리 몇 번 용서해줘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몇 번 용서해줘야 하는지 묻는 베드로가 제게는 좋게 보이지 않고
뭔가 껄쩍지근한데 왜 그럴까요?
용서에 대해서 물으니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용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고
한 번이라도 용서할 의지가 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좋은 태도가 아닙니까?
물론 이런 사람과 비교하면 훌륭하고 좋은 태도이기는 하지만
용서횟수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은 용서하려는 태도이기보다는
용서를 안 하려는 태도이거나 마지못해 최소한으로 하려는 태도이지요.
그런데 베드로의 이런 태도가 껄쩍지근한 것은
저도 그러한 사람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올해 들어서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껄쩍지근한 것이 저의 사랑 태도입니다.
가끔 ‘아무렇게나 사랑하면 안 되나?’하는 생각이 들다가
‘아무렇게나 사랑하면 아무렇게나 사는 것인데’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사랑한다 함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편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누가 잘못을 범하면 직접 개인적으로 충고를 하고,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충고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공동체에 알려서라도 고치게 하라시는데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놈 뭐 그렇게 힘들게 고쳐주려고 해?’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고, 강론을 할 때 열심히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나 예언자처럼 강론도 ‘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니 용서 문제에 도달하면 더 아무렇게나 사랑하고픈 겁니다.
용서하는 것은 엄청 힘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제일 힘든 사랑이 용서하는 사랑이 아닙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다행이도 제게는 용서해야 할 사람이 없고
오히려 용서를 청할 사람들뿐이지만 만일 용서를 해야 할 분이 있다면
이렇게 편한 사랑을 하려는 저도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몇 번 용서해야 합니까?’하고 주님께 여쭙거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한다는 말입니까?’하고 대들 겁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거의 매일매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사랑을 할 것인가, 정성껏 사랑을 할 것인가?
인간적인 사랑을 할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