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어제 베드로의 질문에 이어 오늘 바리사이의 질문은 질이 좋지 않습니다.
어제는 어떻게 하면 용서의 의무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소극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이기에 나쁘다면
오늘은 질문의 의도 자체가 주님을 시험키 위한 거기에 나쁘기도 하지만
그 내용도 이혼을 전제로 이혼을 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기에 나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같이 살아보려는 자세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제 안 되게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자세이니 참 고약하지요.
이는 마치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을 버리고 새 것을 사려는 아이가
뭐라고 이유를 갖다 붙여야 부모가 OK할지 그 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아내는 버리거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과 같지 않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소유할 권리도 없지만
버릴 권리도 인간에게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결혼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인연이라는 것이
천주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조차도 남녀가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수천 겁의 전생의 인연이 모여 이루어지는 거라고 가르치고
천주교는 이 인연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인을 인연이 아니라 선택일 뿐이라고 하면 신앙이 없음이요,
인연으로 여기고 그 인연을 소중히 하면 신앙이 있는 것이고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신앙이 더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생각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의 차이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차이를.
무엇을 좋아하든 사람을 좋아하든 좋아할 때는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이 싫어질 때 소중하던 것은 쓰레기가 되고
그래서 버려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소중한 것은 이렇게 싫고 좋음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어야 하지요.
저는 저로서 소중하고 존귀하지
누구에 의해 소중함과 존귀함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석가모니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깨달은 다음 제 일성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했지요.
그런데 이것은 나만 존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존귀한 것처럼 너는 너로서 존귀하다는 뜻이며
인간은 누구나 다 고유하고 그로서 존귀하다는 뜻인데
제 생각에 이런 고유함과 존귀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랑일지라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한 인간을 진정으로 소중히 그리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실 뿐 아니라
소중히 여기시기에 관계도 사랑으로 맺어주십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중매쟁이가 되어 결혼한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축복 하에
사랑이 승화되고 완전해지기 위해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중매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고,
하느님이 가장 완벽한 중매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며,
그러기에 하느님이 지금의 이 배우자를 맺어주신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고 따르며 사는 것이 신앙인의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