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해방시키시는 분,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
살 수 있는 땅을 주시는 분.
오늘 여호수아기에서 하느님을 이런 분이라고 얘기한 것은 누구일까요?
여호수아일까요? 이스라엘백성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한 말일 것 같은데
뜻밖에도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여호수아에게, 아니 하느님께 한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오히려 하느님을
거룩하시지만 질투하시는 분이라고 하며
잘못하면 벌주시고 다른 신을 섬기면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으면서 자주 놓치고, 오해하는 것이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자 정의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의 하느님을 벌주시는 하느님만으로 오해하고
정의로우시고 벌주시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며,
사랑의 하느님은 마냥 용서만 해주신다고 오해하고
벌주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벌이 사랑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하느님 오해를 교정해주고, 아울러
이런 하느님을 선택할 것인지 다른 신을 선택할 것인지 선택을 하고 합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처럼 우리가 사랑의 상대를 선택할 수 없고, 그래서
배우자를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합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선택의 여지없이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젊은이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아서 부모들이 속상해 하는데 어쩌면
이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음은 자기들이 선택치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이거나 반발까지는 아니어도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기에 의미를 못 느낀 걸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유가 주어진 것이고 권리가 주어진 것이며,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주도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하시지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이게 보통이고 정상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도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주셔서 주도권을 우리에게 넘기시는 겁니다.
당신과
당신의 제의와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선택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거절당할 위험을 감수하시겠다는 겁니다.
당신을 강요하실 수 있고,
제의치 않고 당신의 뜻을 강요하실 수 있으며,
당신만 사랑하도록 만드실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시고,
하느님이라는 분이 채신머리없게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라고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여러 사랑 중에서 제발 선택해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채신머리없는 하느님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선택하실 겁니까, 거절하실 겁니까?
선택하더라도 권리로 선택하실 겁니까, 사랑으로 선택하실 겁니까?
오늘!!!
이 죄인이 어쩌다가 그분께 택함을 받았는지...
어쩌다가 이 큰 죄인이 그분께 이토록 큰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편에 서게 되었는지...
정말 어쩌다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그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저 내가 그런 너를 그대로 사랑한다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젔다고...
감사와 찬미를 그리고 마음을 다한 사랑을 내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