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을 꼼꼼히 읽은 분들은 적잖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복음의 말씀이 독서들이 얘기하는 것과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와 바오로 사도는 모든 민족, 곧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민족도
주님의 산으로 초대되어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복음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서만 왔지
강아지들인 이방인들을 위해 온 것은 아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에 기껏 오셔놓고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구원하러 왔지 한국 사람을 구하러 온 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정말 그렇다면 한국에는 왜 오시고,
우리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뭣 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정말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오신 것이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주님 말씀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하나는 이방여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방여인을 위한 것이라면 이 여인의 믿음과 겸손을 시험하고,
시험을 통해 그 믿음과 겸손을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한 겁니다.
저도 옛날에 청원장을 할 때 부러 시험을 하고 시련을 준 적이 있습니다.
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격인데 그것은 심술이 아니라
나무를 흔들면 나무를 더 꽉 붙잡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떨어지지 않고 붙잡도록 흔드는 세기를 사람마다 알맞게 해야 하고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음이 가는 사람을 세게 흔들겠지요.
제 생각에 오늘 이방여인은 세게 흔들어도 괜찮을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크게 믿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믿음인 것이고,
그 믿음에 그 믿음이고, 큰 믿음에 큰 믿음인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의 큰 믿음을 믿고서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멸감을 느낄만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자 이방여인은 주님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강아지 취급을 해도 발끈하지 않고 강아지라고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자기와 딸에 대한 큰 사랑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이방여인은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욕과 무시로 그렇게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모욕과 무시를 당해도 평상심을 유지케 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믿음이든, 이웃에 대한 믿음이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든.
아무튼 이렇게 이방여인이 큰 믿음을 보이자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사실 이런 말을 들을 이스라엘 여인은 얼마나 되고
제자들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 칭찬의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부끄러움과 함께 큰 도전을 받았을 텐데 주님의 의도는 이것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