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가파르나움에서 당신이 한 일을 고향 나자렛에서도 하라고
고향 사람들이 요구할 거라고 어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오늘 그 가파르나움에 오셔서 더러운 영과 맞닥뜨리십니다.
그러자 더러운 영은 주님을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하며
주님을 나자렛 사람으로 한정합니다.
그런데 이럴 수 있습니까?
나자렛 사람으로 한정해도 되는 분입니까?
이런 사실에서 제가 오늘 포착한 것은 고향 사람이나
가파르나움의 더러운 영이나 다 장소, 자기의 영역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이는 조폭들이 자기 영역을 일컫는 ‘나와바리’라는 일본말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니까 조폭이든 더러운 영이든 장소에 집착하고 자기 영역에 집착하며,
심지어 개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이 장소와 자기 영역에 집착을 하니 내가
나의 영역, 자기의 사적영역/Privacy를 고집한다면 나는 조폭과 다름없고,
동물들과 다름없으며, 그리고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은 여기에 계시지만 여기에 묶이지 않으시고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계시는 분 아니십니까?
그리고 성령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에서 얘기하듯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경계에 얽매임 없이 어디든 가고픈 곳으로 가시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으로서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시간과 장소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셔서 악령과 대결하신 분이시며
그 악령의 아류들이 하느님의 자녀들 안으로 들어가
노예로 만들고 억압을 하는 곳이면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분 아닙니까?
이렇게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더러운 영들은 상관성을 부정하고,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시는 분으로 여기며 오지 말라, 떠나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자기 영역을 고집하며 아무와도 상관없이 살려는 더러운 영에게
영역을 무시하고 들어오시는 주님은 아무리 사랑으로 오셨어도
그것은 침범이고 멸망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오늘 날 폐쇄성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지요.
자기 방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가족과도 아무 상관없이 사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이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가족들이 갖은 애를 쓰지만
이들은 가족들의 이런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길 뿐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이런 시도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것은 오늘 날 허약하고 타락한 개인주의가 초래한 광범위한 현상으로
수도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음 선포를 위해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수도자들이 자기 방에 갇혀 지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사람은 허약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개인은 홀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세상은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