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어제 예수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과 오늘 성모님의 통고 축일을 지내며
불경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과 어머니 중에 어떤 분의 고통이 더 크셨을까?
제 생각에 어머니의 고통이 주님의 고통보다 더 크셨을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얘기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의 고통을 똑같이 겪으셨을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어머니로서의 고통도 겪으셨을 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드님과 똑같이 겪으신 어머니의 고통과
거기에 더하여 겪으신 어머니의 고통을 나누어 묵상해봤습니다.
어제 주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어
오늘 어머니의 통고 축일을 지내는 이유가
바로 어머니 마리아가 아드님의 고통의 길을 함께 따라가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축일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아들의 고통은 아들의 것이고,
나의 고통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아무리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머니와 주님의 어머니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틀림없이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의 회사가 부도날까봐
아들처럼 걱정을 하고 부도가 나면 똑 같이 괴로워하지만
아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자 한다면
세상의 죄에 대해서 같이 괴로워하기보다는
아들의 희생과 고통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 마리아는 틀림없이 우리와 달리
우리를 당신 아들과 똑같이 생각하셨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죄인을 위해 수난 당하실 때
그 수난 당하심을 막지 않으셨음은 물론 오늘 복음의 묘사처럼
그저 고통을 함께 하시며 옆에 서 계셨을 것이고,
그리고 성모송의 기도 내용처럼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해 빌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성모님께서는 어머니로서의 고통도 느끼셨을 겁니다.
아들의 고통을 그저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과
대신 할 수 없어서 더 안타까운 고통 말입니다.
어린이가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그것은 엄마가 대신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고통을 대신할 수 없어 더 괴로운 사랑의 고통,
이것이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이고 신적인 고통입니다.
이번 중국 순례는 어려움이 많았고 애초 계획대로 안 된 것도 많았습니다.
사드 배치와 북한의 핵실험에다가
다음 5년을 결정짓는 중국의 전국 인민 대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정 중에 두만강을 사이로 북한과 접하고 있는 도문에 갔습니다.
우리가 한국 관광객임을 알고는 전에는 없던 군인들의 검문이 있었는데
총을 들고 올라와서는 괜히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위기상황에서는 오히려 침착해지고 담대하거나 대담해지는 사람이기에
쫄지 않았지만 우리 순례단이 느낄 공포감을 생각하니 그것이 괴로웠습니다.
이때 하느님을 생각했고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했습니다.
아들과 우리에게 수난의 고통을 허락하시고 괴로워하실 하느님과
아들의 고통을 그저 지켜보셔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통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