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난 중국 선교 성지 순례 중에 저희 순례단은 김대건 신부님이
부제로 지내셨던 소팔가자에서 순례를 시작하여
순례 내내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를 읽고 생애를 묵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김대건 신부님에 젖어 지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희가 그렇게 한 것은 또한 순교자성월을 지내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지극히 당연히 순교의 의미에 대해 많이 묵상케 되었지요.
전에 한 번 나눔을 한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근자에 자주 생각하는 것이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일상의 모든 삶을 신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거나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삶과 신앙이 분리된 교회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순교의 의미를 본다면
순교란 것이 천주교를 위해서 순교를 하는 것인지,
천주교의 신앙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 하면 우리가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도
천주교를 위해서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고,
그래서 신앙 때문이 아니라 천주교를 위해서만 순교하라면
순교치 않을 거라는 점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신앙생활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면
순교치 않을 거라는 점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천주교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만 믿는 것일 텐데
천주교를 믿는 것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불행해지고 죽게 된다면
많은 배교자들이 그리 했던 것처럼 우리도 배교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 천주교와 천주교 신앙이 이 세상 행복을 위해서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사랑 때문이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위해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순교한다면 그것은 바오로 사도와 같은 믿음의 열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그 밖의 어떠한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진정 제게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하고
바오로 사도의 신앙이 저의 신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과 갈릴 수 없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우리 신앙의 목적이고 이유여야 하며,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영위케 하는 힘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와 같은 확신/믿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확신이 없기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그런 확신/믿음이 생길 수 있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와 같은 극적인 체험이나 기적이 있어야 할까요?
꼭 똑같은 기적은 아니어도 같은 체험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버렸음에도
그런 나를 결코 포기치 않으시는 끈질긴 하느님의 사랑 체험 말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와 같은 확신에 대한 갈망은 나의 몫이지만
확신을 실제로 갖게 되는 것은 하느님 은총이 아니면 아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