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몇 차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공동체가 어찌 세상에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겁니까?
진정 믿음의 공동체라면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공동체는 참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지 못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참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지 못한 겁니까?
세상에 믿음을 주기 전에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공동체가
세상에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서로 간에 믿음을 주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것은
공동체 내부의 문제일 뿐 세상에 믿음을 주는 것과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공동체 안의 불신이 공동체 밖의 불신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나가서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랑에 배신하지 잃지 않기 위해 더 사랑에 힘쓰는 것처럼
서로 간에 믿음이 있는 공동체는 그 믿음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서 당당히 살아갈 뿐 아니라
그 믿음에 배신하지 않기 위해 믿음직하게 살아 갈 겁니다.
그런데 사실 믿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은 나도 그렇고
같이 사는 형제들도 믿기에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크게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면
믿을 수 없고 작게 믿으면 믿을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저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교만 때문에 믿음의 욕심이 너무 커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믿음을 주지 못하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믿음을 두지 않고
사람에게 믿음을 두려고 하거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서 믿음을 찾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무신론이 아닙니까?
바오로 사도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라는 표현을 쓰는데
교회 중에는 하느님이 죽어있는 교회도 있다는 뜻이지요.
하느님이 죽어있고 사람만 살아 설치는 교회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사람이 설치는 곳에 진리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가 옳다고 하기 때문인데
사람의 진리는 매우 주관적이고 무엇보다 욕망에 휘둘립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가 아니라 자기가 진리라는 왜곡이,
다른 말로 자기합리화가 판을 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하느님의 진리가 기초와 기준과 기둥이 되지 않으면
자기의 진리, 자기합리화가 교회와 공동체 안에 난무하여
도대체 신자들은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는지 모르고,
신자들이 그러하니 세상은 더 믿을 수 없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는
과연 하느님의 집인가, 인간의 집단인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가, 죽어계시는가?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기초와 기준과 기둥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