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제 생각에 연중 제 25 주일은 정의와 공평에 대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늦게 온 일꾼이나 일찍 온 일꾼이나
똑같은 품삯을 주시어 아버지의 길은 저희 길과는 크게 다름을 드러내시니,”
그런데 이런 하느님, 곧 당신 포도밭에 일찍 와 일하거나 늦게 와 일하거나
똑 같이 품삯을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아예 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는 잘해주고 누구에게는 잘못해주는 것만
공평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잘해주고 모두에게 후해도 공평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온갖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났는데 비해
나는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 공평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는 하느님이 똑같이 주셔도 공평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가 더 많이 했는데도 똑같이 주셨다고 생각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생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내가 더 많이 일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내가 더 많이 했다고 생각지만 누가 더 많이 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설사 내가 더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적게 했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품삯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품삯은 은총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상선벌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빛을 거부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그 은총과 사랑을 받아 살아간 사람과 거부하고 반대의 삶을 산 사람이
똑같은 상과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은총과 사랑을 거부하고 죄와 악의 삶을 거듭하던 사람이
뒤늦게라도 회개하고 은총과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때는 같아집니다.
은총과 사랑을 먼저 받고 산 것과 늦게 받고 산 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태중교우로 일생 십계명 어기지 않고, 다시 말해서 죄 짓지 않고 사느라
일생 쪼들리며 고생고생하며 살았는데 일생 맘대로 흥청망청 살다가
죽을 때 세례 받고 죽는 사람이 똑같이 천당에 간다면 공평치 않다고.
일생 이렇게 산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참으로 불행하게 신앙생활 한 것입니다.
은총과 사랑의 삶을 누구보다 일찍 산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계명과 의무의 삶을 힘들게 그리고 억지로 산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살아야 합니다. 계명을 살지 말고 은총을 살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 것이 아니라 그저 은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총을 살고자하면 은총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은총을 살 수 있는지 알아야겠지요.
우선 은총은 공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총은 나의 공로와 노력과 정성의 대가가 아닙니다.
사실 아무리 열심히 산 사람일지라도 죄인 아닌 사람 어디 있고
하느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은총은 본래 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주시고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언제나 후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부터 아버지의 포도밭에서 일한 수고가
헤아릴 수 없는 영예임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본기도처럼
이 은총을 일찍부터 살게 된 것을 영예와 행운으로 생각하며 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