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살고 있는 성북동 수도원은 제가 양성을 받은 곳이고,
청원장으로서 양성을 담당했던 곳이기도 하고,
거의 30년 만에 다시 돌아와 살기에 가장 오래 산 곳이고,
오랜 저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그래서 애착도 가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제가 심은 나무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볼 때마다
그것들이 무척이나 대견스럽고 그것들을 심은 보람을 느낍니다.
그 나무들 중에서도 성거산에서 묘목일 때 옮겨다 심은 소나무와
제 키만할 때 심은 느티나무가 큰 나무로 자란 것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흔적과 그로 인해 드는 느낌도 있습니다.
제가 청원장 때 증개축을 하다가 보를 끊어버려 보강공사를 했지만
온전히 되돌릴 수 없는 큰 흠을 남겨서 저는 내내 죄인으로 삽니다.
그러나 이런 것, 대견한 나무들이나 지울 수 없는 흠인 건물은
자랑스럽더라도 크게 자랑할 것 못되고 흠이더라도 큰 흠이 못되지요.
사람과 비교하면 말입니다.
기업을 크게 일군 사람이 자식농사를 망치면 다 헛것이듯
제가 형제들을 느티나무처럼 잘 그리고 크게 키우지 못했다면,
반대로 건물에 흠을 남긴 것보다 형제들에게 상처를 남겼다면
저의 사람농사와 사랑농사는 실패지요.
저의 사람농사와 사랑농사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만일 실패했다면 왜 실패했을까요?
어제는 유투브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에덴의 동쪽>이
눈에 들어와 몇 십 년 만에 다시 봤는데 그때는
들어오지 않았던 대사가 어제는 들어와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방탕의 피를 어머니에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 작은 아들이
너무도 도덕주의적인 아버지에게 한 말입니다.
“아버지는 저나 어머니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계속 용서했지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이었고
늘 아내에게도 그렇게 살기를 요구했지요.
그러나 그런 요구가 너무 억압으로 느껴지고 그래서
분방하게 살기를 원한 아내가 아들 둘을 낳고 가출을 했는데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 닮았고 주인공인 작은 아들은
엄마를 닮아 아버지는 형을 편애하고 주인공은 더 엇길로 나갑니다.
옳고 바른 것,
그것도 이상적이고 완벽하게 옳고 바른 것을 요구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잘못만 하고 죄를 짓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런 사람은 사랑은 하지 못하고 용서만 하게 되며
주변의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사랑 받지 못하고 용서만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도덕적 완벽주의자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용서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저에게 딱 들어맞는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사랑에 실패한 이유가 이겁니다.
저는 프란치스칸 이상에 대한 욕심이 많고 집착도 큽니다.
저는 끊임없이 프란치스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우리 형제들에게 이상을 요구했고,
그 이상에 맞갖은 사람이 없기에 다 죄인이 되게 했습니다.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함께 기뻐하고 즐기는 한가위에
올 한 해 사람농사와 사랑농사를 돌아보며 저처럼
이 농사에 실패했다고 반성되는 분들은 오늘 짬을 내어
유투브에 들어가 <에덴의 동쪽>을 감상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