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떠나 야포로 내려갔다.”
요나서는 여러 번 읽었고 그래서 다른 예언서와 예언자보다 잘 알지만
전에는 놓쳤던 구절이 오늘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전에도 눈으로는 읽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갔다는 것은
알고도 있었고 그래서 강의도 했으니 오늘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처음 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새로운 의구심과 관점에서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는데 주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을 피해 달아날 수 없는데도 우리가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면
그것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거나 착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주님을 피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일을 피한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도 피하고, 사람도 피하고, 일도 피하고
내 안으로 도망쳐 내 안에 갇힌 것일까요?
사실 주님을 피하여 도망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의 종합이기에 먼저
볼 것은 주님을 피하려는 것은 피해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싶은 데서 오는 무의식적인 모름이고 착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데 모르는 것으로 해달라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알아도 관심을 끄라는 얘기이고, 그 문제에 머물거나 개입치 말라는 것이며,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이 나에게 요구나 부탁을 해오면
어떻게 아는데 모르는 것으로 하냐는 생각도 들고 거부감도 들지만
내가 나에게라면 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가 나의 이성에 작용하여
하느님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모르게 하고 착각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숨었지만 하느님은 다 보셨고,
시편 139편이 얘기하듯 어디를 가도 주님 거기에 계시기에
피해 갈 곳 어디도 없음을 우리는 머리로는 알면서도
언 발에 오줌 누듯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그 다음 이 피하고 보려는 심리를 바꿔야 되며
그런 다음 주님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피해 도망치려는데 실은 주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일을 피하거나 어떤 상황을 피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겠습니다.
사실 요나도 주님을 피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실은 주님이 아니라
니네베 사람과 맞닥뜨리는 것을 피한 것이고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일을 피한 거였지요.
우리는 몇 가지 이유로 피하여 도망칩니다.
싫어서 피하는 겨웅,
두려워서 피하는 경우,
귀찮어서 피하는 경우,
부담이 되어 피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이지만
하나로 요약하면 고통이 내게 들어오는 것을 피하는 것이며,
고통이란 악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각가지 악을 피하는 겁니다.
사실 싫어하는 것을 피하지 좋아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런데 고통과 악을 피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사랑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아서 피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싫고, 다 귀찮고, 다 두렵고, 다 부담이 됩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으면 누구나 다 자기중심적이게 되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누리고, 즐기려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버리고, 피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제도 사제이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당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귀찮은 일이 되었고,
그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으며 그래서 피해 간 것이지요.
하느님을 피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피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직면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