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서 요나는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시고,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게 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벌을 거두시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를 벌레가 먹어 시들게 하심으로써
그에게 드리우던 그늘이 사라지게 하시고 그래서
아주까리 때문에 행복하다가 아주까리 때문에 불행케 하십니다.
요나는 어쩌면 이렇게 얍삽하고, 얕고, 가볍습니까?
한마디로 어떻게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사랑이 없습니까?
하필이면 이런 사람을 하느님은 예언자로
그것도 이민족의 회개를 위한 예언자로 삼으셨습니까?
어떤 의도/뜻이 있으시기에 이런 사람을 예언자로 삼으신 겁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은 다 거기에서 거기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니 요나와 다를 바 없는 우리도
모두 요나와 같은 회개의 예언자가가 되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람은 다 거기에서 거기입니다.
이것은 비관적인 관점이 아니라 회개의 관점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인간은 권력이나 신분적으로만 위계적이지 않습니다.
성덕의 차원에서도 누가 더 위에 있고 밑에 있고를 가리려 듭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성인전을 많이 읽어서 어려움도 많고 문제도 많습니다.
성인을 본받기 위해서 성인을 보는 것이라면 나쁠 것 없고 좋은 거지만
성인과 비교를 하면은 늘 성덕이 부족한 저를 악으로 보기일수이고
저의 성덕의 열등감을 덜거나 덮기 위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덕이 더 있고,
다른 사람은 나보다 덕이 없다고 위아래를 메기는 것입니다.
글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나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이고
그까짓 아주까리 그늘에 행불이 좌우되는 존재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저는 알콜 중독자라고 고백을 하면
저희 형제들이나 저를 아는 분들은 제가 무슨 알콜 중독자냐고 합니다.
그렇지요. 저는 알콜 중독자 하면 연상되는 그런 정도의 중독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술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지만
술이 있으면 더 만족스럽고 행복한 그런 면/정도에서 중독자입니다.
그러니 니네베를 회개케 한 요나가 정작 회개해야 할 존재이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회개케 하기에 앞서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예언자란 사실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회개에서 회개의 선포가 시작되고
자신도 회개하면서 회개를 선포하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 알콜 중독자 모임이 있고 그 모임을 이끄는 신부님이 계신데
그 신부님도 알콜 중독자였다가 술을 끊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앞서 술을 끊으신 분이 술을 끊자고 하니 그 권유가 힘이 있습니다.
나도 끊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고,
그래서 나도 끊어야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합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 죄 없는 양 회개를 선포하면
우리는 즉시 너부터 회개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처럼 자기의 죄를 먼저 회개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회개의 시작이 됩니다.
사순절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의사의 권유로 닭고기 국물을 먹었습니다.
먹은 사실도 마음에 걸렸지만 무엇보다도 안 먹었을 거라고 믿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 한 형제에게 광장으로 자기를 끌고 가
닭고기를 먹고 살이 피둥피둥 찐 걸터듬이를 보라고 외치게 하지요.
그렇게 단식을 많이 하여 피골이 상접한 성인이 그렇게 회개를 하니
신자들이 모두 마음이 찔려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우리는 모두 회개의 동반자요 예언자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신부님의 강론마씀으로 대전지구 밴드회원들은 아침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