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인격적으로 하라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하라고 하십니다.
제 생각에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청해서 얻는데 사람에게 청해서 얻는 것과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청해서 얻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은 주님께서 청하여 얻으라고 하셨지만
청하지 않고 스스로 가능성을 찾고 문을 두드려 얻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는 사람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리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예 찾는 것을 포기하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망이 있다/없다를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망可望이란 말을 뜯어보면 희망하거나 소망하는 것이 가可하다는,
희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크게 났을 때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래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희망을 꺼버리고
살릴 방도를 찾거나 다른 병원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찾거나 문을 두드리는 것은 가능성을 믿은 것인데
그 믿음이 다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믿음이 아닌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믿음이 아닐지라도
이런 믿음이라도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 비해 매우 훌륭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아예 희망을 접고는
무엇을 하자고 해도 해보기도 전에 “안 돼”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능성을 믿고 두르려 봐도 될지 안 될지 안 수 없는데
아예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시도조차 않으면 원천적으로 안 되는 거지요.
다음으로 우리가 볼 것은 청해 얻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청해서 얻는 사람은 스스로 얻는 사람보다 믿음이 더 훌륭합니다.
왜냐면 누군가에게 뭘 청하는 것은 겸손하기에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믿기에, 그것도 그의 선의를 믿기에 청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자기도 믿기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을 선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뭘 청하면 아쉬워서 청한다고 생가지 말고
나를 믿기에 청한다고 좋게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전에 대전역에서 구걸을 할 때를 보면 먼저 사람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이 구걸하면 줄 사람인지 아닌지 관상을 보고 있더라구요.
청해서 모욕이나 당할 사람 같으면 아예 청하지 않고
줄 선의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청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사람에게 청하는 것보다 쉬울까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악한 애비보다도 더 좋은 것을 줄 분이라고
우리가 하느님을 믿을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애비보다도 더 좋은 것을 줄 분임을 믿는데 왜 믿기 어려울까요?
그것은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더 좋은 것과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그래서 청하는 좋은 것이 왕왕 다르기 때문입니다.
감기 들은 아이에게 엄마는 약을 주려 하지만 아이는 싫다고 하잖습니까?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 영혼에 좋으라고 고통이나 병을 주시거나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성령을 주시겠다는데 그것이 싫을 수 있지요. 우리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