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첫째와 둘째 계명이 다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이 계명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사랑을 계명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계명이란 자유가 아니라 법이라는 주장이 맞다면
계명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 다시 말해서
하라고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러나와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다른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선택하고 당신을 사랑케 하기 위함이지요.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법이고
법이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벌이 따르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무자비한 자에게
당신도 무자비하실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런데
그렇게 무자비하시면서도 당신은 자비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자비한 자비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주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실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최후 심판 비유를 보면 같은 생각이십니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고,
가난한 사람에게 안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안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받겠습니까?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 그것이 바로 벌이 아닐까요?
자주 하는 얘기인데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지만
햇빛을 사랑하는 사람이 햇빛을 쬐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부합니다.
그런데 햇빛을 거부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고 그것이 벌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결이 조금 다르게
사랑이 첫째가고 둘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명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임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다른 어떤 계명보다 사랑의 계명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고,
율법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며,
정의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에 제일 중요한 것도 사랑이라는 겁니다.
제가 자주 범하는 실수, 아니 죄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지 우리 은사 중에서
가난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고 가난 실천에 있어서도 그럽니다.
우리 은사의 두 기둥이 작음과 형제애인데
형제애보다도 가난이 더 우선일 때가 많다는 얘기이고
가난과 겸손이 합쳐서 작음이 되는 것인데
겸손보다도 가난이 우선하여 작음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고,
형제애보다 가난을 더 중요시하여 숱하게 잘못을 범하고,
그래서 대가를 고통스럽게 치룬 것도 숱한데도
이 가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래서
가난이 풍요롭지 못하고 궁상맞습니다.
그러니 이런 가난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그 영 안에서의 가난(the poor in spirit), 성령의 가난도 아니고
프란치스코가 살고 가르친 그 풍요로운 가난도 아닙니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내세우기 위한 집착한 것일 뿐이고
그래서 형제애를 깨는 우월감의 표시일 뿐입니다.
이것을 또 다시 아파하고 가슴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