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 중에 죽겠다고 나선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것이 아닌 이상 죽겠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죽게 되어서 죽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대부분의 우리 인생은 죽게 되니까 죽는 것이고,
또 대부분은 죽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죽음, 죽음뿐인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자살도 불행한 것이지만 죽게 되어 죽는 것도
죽을 때 죽음밖에 없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우리 인생은 가는 것이고,
그래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누구나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인데
죽음만 바라보면서 늙어가고 죽어간다면 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그런데 저는 다 그렇게 죽는다고 하지 않고 대부분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살 외에도 죽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사람,
다시 말해서 스스로 죽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지요.
죽게 되어서 죽든 나서서 죽든 사랑이 있는 사람은
죽을 때 죽음뿐인 죽음을 맞지 않고 사랑이 있기에
사랑하는 하느님이 계시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죽음에 함께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풀이하면 영혼을 위로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어제 모든 성인의 날에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성인들과 달리
하느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날,
달리 말하면 연옥에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요.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계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에 있는 것은 아직 치러야 할 죄 값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 죄 값을 연옥의 단련으로 씻어내야지만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저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말이 맞다 하더라도
그 씻어내야 할 죄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지 않는 죄 말고 다른 죄가 있으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죄 말고 다른 죄가 있겠습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람 중에는 혹 남을 위해 죽을 사람이 없어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도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함이 죄이고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죽음뿐 죽음을 맞게 되고
사랑 감각과 사랑 의지를 갖게 될 때까지 연옥에 있게 되겠지요.
이런 묵상을 하며 제게 제일 걸리는 분은 아무러케도 저의 어머니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제가 임종을 지키지 못하여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눈으로 확인치 못해서 그런 것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이든 자식들의 사랑이든 사랑을 느끼며 돌아가셨을까?
아니면 그저 죽음만 보시고 죽음에로만 내달리시거나 내몰리셨을까?
이 위령의 날에 또 생각되는 것은 돌아가신 영혼 뿐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들 중에도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영혼들이 많은데
돌아가신 영혼들만을 위한 기도와 사랑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들도 제외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그리고 너도 나도 사랑 감각과 사랑 의지가 살아나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도록 기도합시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