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지난 월요일 복음,
그러니까 루카복음 13장 10-17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다르다면 13장에서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늘 14장에서는 바리사이 집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겁니다.
오늘은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여 식사대접을 한 것인데
저는 여기서 왜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였고
식사대접까지 한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회당장을
주님께서 묵사발 만든 얘기를 틀림없이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다시
수종병자를 식탁에 같이 있게 한 것은 무슨 의도인지 생각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서술만 보면 바리사이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고
주님의 말씀도 그를 크게 나무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는 주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바리사이는 주님께 식사대접을 하고 있고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런 불만의 표시가 없습니다.
식사는 싫어하는 사람하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특별한 호의나 사랑이 있을 경우 식사에 초대하잖아요?
그렇다면 주님도 호의를 가지고 초대에 응하신 것이고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라기보다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실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시고
누구에게나 그에 맞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은 바리사이에 대해 무조건 적대감을 가지시고
당신의 복음 선포와 사랑에서 이들을 포기하거나 배제했을 것 같지만
결코 피하거나 포기치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마주치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한때의 자기처럼 죽어라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그들을 위해
자기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척될지라도 뭔가 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포기치 않고 한두 번의 노력으로 포기치 않는 바오로의 사랑은
바로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랑은 한두 번 애써서 효과가 없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진정한 사랑과 큰 사랑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부모 특히 어머니가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지치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지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거지요.
사실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는 엄마가 아니고
그래서 돌아가시고 나면 그 잔소리가 그리웁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 아니고 사랑이고 가르침인데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요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가르침이고,
무엇을 하든 본질적으로 판단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미워죽겠다고 제게 고백을 할 때
저는 종종 그러면 그가 정말 죽었으면 좋겠냐고 본질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면 밉기는 해도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펄쩍 뛰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마땅한지 죽이는 것이 마땅한지
이렇게 근본적으로 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사랑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언제고 정당하고 언제나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