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아이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로 처음보는 아이들의 첫 마디는
인사도 이름을 묻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몇 살인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누가 형에고 누가 동생인지
순식간에 정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모습으로
성인 남자들이 서로 편하게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은
술자리에서 서로 몇 살인지 공개하고
그것을 통해서 누가 형인지 누가 동생인지
서열이 정해지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외국말과 달리 우리말은
형제라는 단어 안에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의 brother라는 말이
가족 안에서 남자들을 뜻한다면,
우리말에서 형제는
형과 제의 합성어,
즉 형과 동생을 함께 일컫는 말로서,
단어 안에서 이미 형과 동생이라는 구분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정하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서열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존경하는 형의 모습은
동생의 어려움에 귀기울여 주고,
형이 가진 힘 안에서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모습입니다.
형이기 때문에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형이기 때문에 동생보다 더 좋은 것을 갖는 모습은
존경하기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직책을 받은 것은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지,
그 직책을 통해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몸은 편한 것을 찾고,
내가 직접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하기 보다는
남에게 시키고 싶어 합니다.
남 앞에서 드러나는 일은 하고 싶지만,
드러나지 않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남에게 드러나는 일을 할 때에는
그 일을 통해서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지지를 받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에 함께 해주십니다.
그러한 일들은 대부분 힘든 일들인데,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약함을 보고,
그 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싶은지
아니면 하느님과 함께 할지는
우리 각자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지지가 일시적인 것이라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은,
그것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서
많은 아쉬움을 느낄지라도,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