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을 지내는 이유가 뭔가?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는 복음을 읽는데
라떼라노 대성전과 같은 성전을 많이 짓자는 건가 허물자는 건가?
이런 성찰의 끝에 도달하는 답은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성전이면 세우고 복마전이면 허물어라!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세워야 할 성전은 어떤 거고 허물어야 할 복마전은 어떤 건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해서 정리하면 이런 것일 겁니다.
첫째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정신, 곧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세우는 방식은 성령을 모시는 것이고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허물어야 할 복마전이 뭔지도 자연스럽게 답이 나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정신, 곧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욕심이 가들하고 성령 대신 악령과 더러운 영이 머물고,
우리의 정신을 기도와 헌신의 영이 아니라 육의 영이 차지하고 있으면
그것이 복마전이니 허물어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 가난으로 욕심의 복마전을 허물고,
회개로 썩어빠진 정신과 육의 영을 몰아내는 겁니다.
이렇게 성전의 정화와 파괴가 이루어진 다음 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
밖의 성전이 아니라 나를 성전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성전정화와 재건이 이루어진 다음에 해야 할 것이
우리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듯이
수신修身의 차원 다음에는 제가濟家의 차원이겠지요.
사실 공동체 구성원이 각기 모두 수신이 잘 되어 있으면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각자가 다 성전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리고 나름대로 성전이 되었음에도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짓 성스러움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는 것만으로,
사랑의 친교 없이 성체조배를 많이 하는 것만으로,
다른 이의 성화 없이 자기만 성화하는 것만으로
성화되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는 게 바로 그거지요.
실로 우리 가운데는 거룩한 외로운 자가 많습니다.
진짜 거룩한데 다른 사람이 따돌려서 그런 외로움도 있지만
사랑이 없어 외로운 거짓 거룩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 없는 거룩함은 거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저도 사랑 없는 거룩함에 자주 속습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을 우리가 가로 막는 것인데
우리는 또 다르게 속기도 합니다.
거짓 사랑에 속아서 거룩함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을 모심으로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 사랑인데
하느님도 거룩함도 없이 서로 눈감아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속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로 성전이 되는 것, 사랑의 성전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공동체로 성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요구가 아니라 전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함도 사랑도 훈계나 요구가 아니라 전염이 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날씨가 많이 차가워지고있슥니다.
건강하시고 복된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릉골에서 한 아타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