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른 좋은 말씀 다 제쳐놓고 이 말씀만 가지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도 선의로 가득하고, 온갖 지식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서로 타이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 당시의 로마인이나 지금의 우리나
정말 믿을만하기에 믿는 것인지 아니면 믿어주는 것인지,
다시 말해서 로마인이나 우리가 그리 믿을 바 못 되지만
바오로사도의 믿음의 능력 때문에 믿어주는 것은 아닌지.
사실 우리는 그리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우리에게 선의가 얼마간 있지만 선의로 가득하지는 않고
지식도 마찬가지며 서로 타이를 능력은 참으로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믿어주는 것이고 그럼에도 믿어주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으로 믿어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작전상 믿어줍니다.
믿어줄 때 사람은 믿음에 배신치 않으려고 하고 더 나아가
보답하고자 하기에 그래서 믿을만하지 않아도 믿어주곤 합니다.
그렇지만 믿어줄 때 그 믿음에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더 나아가
보답할 거라고 머리로는 알아도 믿지는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그릇이 크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믿음의 그릇이 크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속고만 살았냐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믿지 못하는 것은 속은 횟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번 속아도 된통 속아 배신의 상처가 크면 믿기 어렵게 되고,
백 번을 속아도 배신의 상처를 받지 않으면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란 상처를 받는 사람의 문제이기에
상처 받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저는 가끔 이런 억지소리를 하지요.
왜 상처를 받습니까?
당신은 준다고 다 받습니까? 뇌물을 줘도 받고 전염병을 줘도 받습니까?
받고 안 받고는 당신에게 달렸고 받기 싫으면 안 받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주고도 돌려받지 않을 사람에게는 돈 백만 원 떼먹혀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돌려받으려 하고 돌려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받지 못할 때 상처받는 거지요.
그러니까 믿는 것과 믿어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받기보다 주고자 하듯이 믿음도 주고자 하고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속는 셈치고 믿어주는 겁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수없이 속아주고 믿어줄 때 언젠가
믿음을 배신으로 돌려주지 않고 믿음에 믿음으로 돌려주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때문에 수없이 속아주고 믿어주듯이
사랑을 받는 사람도 자기를 믿어준 것이 사랑임을 느낄 때
달리 말해 믿음을 준 게 아니라 사랑을 준 것임을 느낄 때
믿음을 사랑으로 받아서 사랑의 응답을 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랑을 부모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이 믿음의 사랑을 갖게 되듯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믿음의 사랑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믿고 하느님처럼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치 않으셨다면 어떻게 배신의 자유를 주셨겠습니까?
자유로 배신하고 자유로 당신께 돌아오도록 돌아올 때까지 믿어주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오늘도 받아 믿음의 응답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