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매우 짧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 그 내용도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주인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니 겸손하게
그리고 종답게 군말 없이 분부하심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하느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가 갈리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실로 인간이 하느님께 대들고 신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금, 곧 한계를 넘지 않고
명하신 대로만 했으면 죄 짓지 않았을 거고 죄의 벌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함에도 그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처럼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명을 거스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단순한 주종관계를 넘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인정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고, 우리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겸손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내용이지요.
옛날과 비교하여 얘기하면 근본이 양반인 사람이 있고,
근본이 상놈인 사람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반상의 질서와 명령과 복종의 체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근본적인 관계를 인정해야만
그 다음의 주종의 관계/명령과 복종의 관계도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계명을 알고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그러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기도 합니다.
사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거스르는 것에 비하면
약과이고 죄로 치면 귀여운 범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의 저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도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도 거스르지만 지금보다 훨씬 교만했던 옛날에는
하느님을 저의 주인님으로 인정하기 싫어서 거슬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30대 중반까지도, 그러니까 수도자로 종신 서원을 하고
사제품을 받고 난 뒤에도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하느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런 식이었지
‘저의 주 하느님, 이 종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런 식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라고 할라 치면 간지럽고 닭살이 돋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존재하신다는 것도 믿지만
그 하느님이 나의 주인님이라는 것은 인정치 않고픈 거지요.
하느님이 나의 주인님이 될 때 나는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주인이고 싶지 종이고 싶지 않으며,
특히 남자들은 교만하면 할수록 주인이고 싶지 종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인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지금 10명이 있는데 1/10로 있거나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주인공이 되거나 심지어 좌중을 쥐고 흔들려 한다면 주인이고 싶지
종이고 싶지 않은 표시이고, 적어도 나는 나의 주인이고 싶은 표시겠지요.
나는 정말 주 하느님의 쓸모없는 종이라고 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