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에서 공부를 할 때
건축하는 친구들을 둔 덕분에
최신 건축사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때가 많았다.
어느 건축가는 집 안에 문이 없는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
방문이고 화장실 문이고 문이란 문은 하나도 달지 않는 집을
설계하여 화제라고들 하였다.
문은 공간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때론 그 때문에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프라이버시와 내면성, 은밀성을 드러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나라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이러한 내면성, 신비성의 상징이기에 문이란 개념이 필요하다.
절에 가보면
절이 시작되기 좀 멀찍이
일주문이라는 게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공간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벌써 속세와는 다른 상징적인 공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이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 이 일주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 자신이 바로 문이시다.
우리와 하늘나라를 연결시켜주는 문이다.
그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이다.
그 문은 보통문이 아니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남대문과 동대문, 독립기념관의 그 문보다
더욱더 안전하고 막강한 방화문이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혼이라면
이 문을 늘 찾아야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
문을 여닫을 때 조심하여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 교육 중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침묵을 유지하여 다른 사람의 잠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이겠지만
바로 <문이신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라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 인생은 수없는 문(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내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도
나는 대문을 거쳐, 현관문을 거쳐, 봉쇄구역 문을 거쳐
방문을 거쳐 내실 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여러 다른 문들이 있다.
내 방 안에만도 창문이 또 몇 개인가?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우주적 공간을 살포시 내다볼 뿐이다.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쬐끔씩 내다볼 뿐이다.
이 문이 그냥 들어오고 나오는 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때
그 문은 바로 예수가 된다.
예수는 바로 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만나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방 안에 앉아서도
창문을 통해 하늘나라를 내다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에 바로 예수께서 계신 것이다.
오늘 비온 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정원은 더없이 싱그럽다.
메마름과 답답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하늘나라의 모습을 잉태하고 있다.
바로 이 문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오늘 문을 지날 때마다
또 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잠시 엿보자.
그 싱그러움을...
건축하는 친구들을 둔 덕분에
최신 건축사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때가 많았다.
어느 건축가는 집 안에 문이 없는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
방문이고 화장실 문이고 문이란 문은 하나도 달지 않는 집을
설계하여 화제라고들 하였다.
문은 공간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때론 그 때문에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프라이버시와 내면성, 은밀성을 드러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나라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이러한 내면성, 신비성의 상징이기에 문이란 개념이 필요하다.
절에 가보면
절이 시작되기 좀 멀찍이
일주문이라는 게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공간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벌써 속세와는 다른 상징적인 공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이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 이 일주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 자신이 바로 문이시다.
우리와 하늘나라를 연결시켜주는 문이다.
그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이다.
그 문은 보통문이 아니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남대문과 동대문, 독립기념관의 그 문보다
더욱더 안전하고 막강한 방화문이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혼이라면
이 문을 늘 찾아야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
문을 여닫을 때 조심하여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 교육 중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침묵을 유지하여 다른 사람의 잠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이겠지만
바로 <문이신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라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 인생은 수없는 문(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내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도
나는 대문을 거쳐, 현관문을 거쳐, 봉쇄구역 문을 거쳐
방문을 거쳐 내실 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여러 다른 문들이 있다.
내 방 안에만도 창문이 또 몇 개인가?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우주적 공간을 살포시 내다볼 뿐이다.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쬐끔씩 내다볼 뿐이다.
이 문이 그냥 들어오고 나오는 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때
그 문은 바로 예수가 된다.
예수는 바로 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만나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방 안에 앉아서도
창문을 통해 하늘나라를 내다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에 바로 예수께서 계신 것이다.
오늘 비온 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정원은 더없이 싱그럽다.
메마름과 답답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하늘나라의 모습을 잉태하고 있다.
바로 이 문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오늘 문을 지날 때마다
또 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잠시 엿보자.
그 싱그러움을...
다른 문을 열어두시고
피할 길을 주시는 주님!
생명의 영원한 문 되시는 주님!
그 문으로 저도 들어가게 하소서..
정작 제가 노크도 안하고 들어가려는 생각도 안하고 투덜거린것 같아
부끄럽습니다...최고의 건축사님 생각도 근원은 주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예수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시겠지요.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