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부터 불을 좋아했고, 그래서 불 때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좋아한 이유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제가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방을 덥히고 식구들이 일어나 따듯한 물로 씻게 했기 때문이지만
그런 선행의 이유 말고도 불 때는 것 자체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불을 때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고 불에 빠져듭니다.
그러니까 새벽의 고요함 속에 불 속으로 제가 들어가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불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불을 보고 있으면 불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듯
마음속의 온갖 고뇌와 상념을 태워버리고 그래서
마음은 비어 공空이 되고 불이 안으로 들어와 불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불이란 것이 이런 것이니 제가 어찌 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험 때문에 1980년대에 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 동자승이 불을 때며 불에 빠져드는 장면이나
다비식과 같은 장면을 통한 불의 상징을 저는 금세 이해할 수 있었고,
불을 숭배한다는 배화교拜火敎의 교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불을 왜 숭배하는지를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요.
불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얘기했냐 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찾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는 오늘 지혜서 말씀에 대한 저의 공감을 얘기키 위함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는 순간 “아! 하느님” 한다든지
프란치스코처럼 “당신은 아름다움이시나이다.”고 하면 좋으련만
“아! 아름답다.”하며 그 아름다움에 풍덩 빠져버리고는 맙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신앙이 아닌 사람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과 프란치스칸이 아닌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포항의 지진과 같은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공포에 질립니다.
우리 인간은 아름다움에도 빠지지만 공포에도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두려움에 빠지는 대신
그리 만드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는 자연의 두려움 그 자체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그 원인이신 하느님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자체이신 하느님도 볼 수 있어야 하며
존재자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프란치스칸이라면 프란치스코는 어찌 했는지 봐야겠습니다.
전기 작가인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지요.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이 그에게는 선이었고, 그분의 발자국이 서려 있는
사물들을 통하여 그는 어디서나 사랑이신 그분을 따라갔다.
그는 모든 사물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오늘은 지혜서와 함께 이것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